실행론 설법 32-심본색말(心本色末)과 색심불이(色心不二)

밀교신문   
입력 :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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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본색말은 마음을 기준으로 물질을 바라보는 일원논리(一元論理)를 말함이요, 색심불이(色心不二)는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며 일치하여 평등하다는 이원논리(二元論理)를 말합니다.
 
현상의 색[物質]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중생에게 마음이 기준이 된다는 일원논리를 가르친 것이 심본색말입니다. 심본색말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마음과 현상[(색)色], 어느 것으로도 기준을 세우지 않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원논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원논리가 색심불이의 가르침입니다.
 
심본색말과 색심불이는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특정한 하나로 기준을 세우는 것과 모든 것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심본색말이요, 진리의 눈으로 보면 색심불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법계와 중생계는 동체로써 색심불이에서 시작하여 심본색말로 이어지고, 심본색말에서 다시 색심불이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은 먼저 심본색말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심본색말의 이치를 모르면서 색심불이를 논하면 1층이 없는 2층과 같아 세상 바라봄이 넓지를 못할 것입니다. 다시 비유하면, 하나의 뿌리에서 줄기와 잎, 꽃과 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줄기와 잎이 없고, 꽃이 없으면 열매 또한 없습니다.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한 뿌리에서 파생하여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품에서 나누어진 심본색말이며, 각각 다른 모양을 가졌으나 같은 성품이므로 색심불이입니다. 마음이다, 물질이다. 차별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다르다는 것을 인증하고 긍정하면서 어느 것은 소중하고, 어느 것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색심불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심본색말은 낮은 진리요, 색심불이는 높은 진리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평등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뭇 강물이 모이는 바다, 맑은 물, 탁한 물, 개울물, 강물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여 둥근 한 방울로 수평을 이루면서 한 맛을 냅니다. 이것이 색심불이입니다. 그리고 바람에 맞추어 강약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물과 파도의 관계가 심본색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은 곧 물과 같이 변함없는 불심(佛心)이요, 색은 바람같이 무한하여 헤 아릴 수 없이 작용하는 성품[중생심(衆生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품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아닌 성품입니다. 불(佛)의 마음은 사용불가(事用不可)지만, 사용이 가능한 것은 성품입니다. 성품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며, 작심삼일(作心三日)의 작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품인 마음은 땅을 보면 땅을 닮고자 하고, 불을 보면 불을 닮고자 하며, 물을 보면 물을 닮고자 하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자 합니다.
 
성품은 또한 권력을 생각하면 권력에 맛 들여지고, 재물을 생각하면 재물에 맛 들여지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성품은 시간과 장소와 물건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성품을 크게 말하면 생을 바꾸어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자성을 찾는다는 것은 곧 성품을 찾는 것이요, 수행한다는 것은 성품의 변화를 종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중생이 성품을 바꿀 수 없다면 고행 정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삼고인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성품을 다스리는 법이 8만 4천 종이나 됩니다. 성품을 잘못 사용하면 8만 4천의 번뇌가 되고, 바르게 사용하면 8만 4천의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일체는 오직 마음으로 만든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하고, ‘대일경’에 ‘진실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라<여실여자심(如實知自心)>.’ 하였습니다. 모두 중생의 성품을 설한 것으로 자신의 행(幸)과 불행(不幸)은 자신의 성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품을 다스리는 가장 쉬운 법이 일상생활 속에 있습니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보는 법입니다. 자연을, 사람을, 시간을 그대로 보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의 수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보이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름의 원인과 다름의 값을 찾는 것입니다.
 
중생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상반하는 세상에 살면서 즐거움이 많기를 바랍니다. 동업(同業)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상대성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착함은 생각을 모아 짓게 되고, 악(惡)은 무심결에 짓게 됩니다. 무심결에 짓는다는 것은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준으로 판단하며, 남이 가진 것을 시기 질투하고, 자신의 큰 허물은 감추고 상대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면서 이것이 악인 줄 모르고 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는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명(無名)인데 물질을 첨부하여 유형 유색 유명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유상의 몸으로 출생하였기에 유상의 삶을 살면서 물질에 애착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성품에서 물질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지는 순간부터 선악 시비, 선후 본말, 호오 장단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자체가 그릇된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이것을 벗어나기란 어렵습니다. 이루는 것도 성품이요 변화시키는 것도 성품입니다. 사용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이제 그 “다를 뿐이다.”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괴로움과 윤회를 벗어날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봄과 가을을 비교할 수 없고 여름과 겨울을 비교하지 못합니다. 봄이면 새싹이 나고, 여름의 강한 햇빛, 가을의 서늘함, 겨울의 찬바람, 이것이 사계절의 다름입니다. “다르구나.” “다를 뿐이다”하는 생각이 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며, 비로자나불과 합일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입니다.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작용하므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생계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구나”, “소년과 노인이 다르구나”, “아름다움과 추함이 다르구나”,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다르구나”,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다르구나”, “원만한 사람과 장애인이 다르구나”,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다르구나”,  “웃는 사람과 성내는 사람이 다르구나”, “인색한 사람과 자비로운 사람이 다르구나”,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다르구나” 등 8만 4천의 다름이 있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할지언정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긴 것과 짧은 것,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빨갛고 노란 것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의 모습에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귀하다. 천하다. 비굴하다. 훌륭하다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다를 뿐이다.”입니다. 한 물건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듯이 한사람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고, 한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고, 한사람이 모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맡은 것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배움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좋아하는 부분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습관이 다릅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상대가 대신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졌고,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가 채워주고, 자신의 부덕을 상대가 가졌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존중하고, 긍정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색심불이입니다. 이생에서는 나와 남으로 나누어졌지만, 우리는 한때 부모였고, 형제였고, 부부였고, 자매였고, 친구였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이법(不二法)의 실천입니다.
 
이제 자신만의 생각을 내려놓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보고 들으면서 “다르구나”를 익히는 것입니다. 자신 수준의 선악 시비 선후 본말의 차별을 없애고, 자신 수준의 호오 장단 상하 고저를 버리고 다만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를 반복하는 공부를 화두를 탐구하듯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다르구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를 뿐이다”를 관조(觀照)하는 삼밀묘행(三密妙行)을 실천하는 가운데 낱낱의 서원을 세우지 않아도 불보살이 수행자의 마음을 알아서 부족함을 채워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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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