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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끓이지 않는 시간

밀교신문   
입력 :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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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커피가게가 부쩍 늘었다. 당연히 커피를 즐기는 인구도 늘어났다. 몇 해 전인가 보다. 오랜 세월 믹스커피만 찾다가 소위 내려 먹는 커피를 익히기 시작했다. 옆 자리 동료의 새로운 커피 담론과 참견도 한몫했다. 그 후 커피 냄새가 시공간을 깨우고 초보 바리스타의 서툰 솜씨를 과장적으로 격려하는 동료들 덕분에 커피 내리는 일은 귀한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커피의 소비도 빨라졌는데 마침 일에 쫓겨 원두 주문을 며칠 놓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오늘은 커피 안 내리시냐며 은근히 미숙련공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 때 포스트잇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 붙였다. ‘맛있는 커피를 끓이기 위해서는 커피를 끓이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옆에서 동료가 그것을 보고 가볍게 웃으며 믹스커피 한 잔을 내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메모지에 남긴 그 문장은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발견한, ‘맛있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빵을 굽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빛나는 문장을 변주한 것이다. 저자인 이타루는 일본에서 작은 시골빵집을 운영하는데 그의 책과 함께 그의 빵집은 이미 많은 이웃나라까지 소문이 났다. 그 이유가 뭘까. 우선 그는 탁월한 실험정신으로 자신이 직접 배양한 천연 효모를 이용해 빵을 빚는다. 그 흔한 설탕과 버터, 우유와 달걀 하나 없이 오직 누룩 균만으로 반죽을 한다. 효모란 그날의 기온과 습도, 심지어 그릇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하니 효모를 이용해 반죽하는 과정에서 이미 빵의 질감과 풍미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흥미가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손길과 천연의 재료 못지않은 그의 두 가지 철학이 그의 빵 속에 녹아 있다. 하나는 시골의 이웃 농가가 정성을 다해 공급해주는 재료를 이용하므로 이웃과 상생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빵집이 지역 경제의 작은 마중물이 되는 셈이다.
 
또 하나는 빵을 더 잘 만들기 위해 빵을 안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특히 이 점을 주목하고 싶은데 여가 시간에 빵만 보지 않고 세상을 보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감성을 연마하는 시간 등이 축적돼 더 맛있는 빵을 만드는 아이디어나 에너지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사실 일의 피로도가 높아지면 생산성도 떨어진다. 속도의 시대에 느림과 기다림의 커피인 블루보틀 국내 1호점의 등장이 왜 화제가 되었겠는가.
물론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경계점도 있다. 일주일에 삼사일 일하고 이삼일을 쉰다고 모두가 탁월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천연 효모를 찾아내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빵을 반죽하고 빵을 굽는 자신만의 비결을 찾아내는 데에는 끝없는 실패와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련과 숙련 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게임이든 수업이든 예술창작이든 뉴스를 전하는 방식이든 다르지 않다. 이쯤이면 됐다는 안도감을 넘어 어떤 본질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꾸준함과 겸손함과 실력이 함께해야 한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진정성과 방향성을 함께 보여준다. 또한 그런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삶도 진화한다.
 
오늘도 습관처럼 커피를 내린다. 커피 한 잔의 여유로 우리는 무엇을 빚을 수 있을까. 이타루의 빵과 책을 머금으면 답을 찾을까. 커피를 끓이지 않고 아무 답도 찾지 않을 권리는 또 어떨까. 어느 길이든 잠시 생각을 놓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통로는 열어두어야 하리라.
 
한상권/심인고 교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