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7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5-07  | 수정 : 200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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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 아사리 1. 입당의 목적 오늘날 불가사의 아사리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주변 자료들을 통하여 그가 통일된 후인 신문왕(681)때부터 경덕왕(764)때에 걸쳐서 생존했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가 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면서 체제에 대한 통합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화합을 이루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던 때였다. 아울러 자연재해도 빈번하여 황룡사에 유성이 떨어지고(673),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입고(674), 영묘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고(703), 미륵사가 지진으로 파괴(719)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어수선한 시기 불교계에서도 자리(自利)적인 수행이나 불경공부만 하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활동했던 원효, 경흥, 태현 같은 스님들은 진호국가도량의 근간을 이루는 금광명경, 인왕경 등의 연구서 들을 저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가사의를 비롯한 현초, 의림은 직접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무외로부터 인도에서 전해진 밀교의 가르침을 전승 받았다. 불교계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 난 것은 밀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당나라에서 왕권의 강화와 국가안위를 위해서 적절히 활용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불가사의가 입당유학을 떠난 목적도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국가의 안녕과 장래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당나라의 경우, 인도에서 들어 온 선무외나 금강지, 불공이 현종의 외호 아래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서 역경사업과 더불어 법맥을 전승하고, 진호국가도량을 개설하여 국왕의 안위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여러 차례 베풀었다. 특히 불공의 경우는 승려로써 관직을 부여받고, 국가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수시로 현종의 칙령을 받들어 호국도량을 개설한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가사의 개인적으로도 입당을 결심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가 머물고 있던 영묘사에 666년과 703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원이 피해를 입은 일은 그로 하여금 유학의 길을 떠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불가사의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무외삼장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기725년부터 735년 사이 당나라 장안의 보리원에서 선무외삼장의 가르침을 받아 공양차제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어쨌든 현재 우리 나라에는 그의 저작이외에 여타의 연구자료는 발견할 수 없지만 현존하고 있는 진언관련 문헌이나 문화재 중에는 그의 저작 중에 담겨 있는 진언들이 다수 수용되어 있으며, 근세에 만들어진 석문의범의 경우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2. 밀법의 전승 불가사의가 선무외를 만나게 된 것은 자신이 처한 입장, 국내적인 혼란, 선무외의 입당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무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자신의 처지와 닮은 데가 많아서였는지 몰라도 저작 속에서 스승의 인물됨을 극찬하고,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 자체에 대해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저작 중에는 "소승 불가사의는 다행히도 화상을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게 된데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자신의 스승이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이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그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밀법에 입문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은 불가사의가 그렇게 스승의 인간상을 강조하고 있는데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신라의 왕실에서는 왕자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거나 출가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여기서 불가사의의 경우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때문에 선무외의 출가과정과 인물상에 대해서 그의 저작 중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전기를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불가사의는 선무외를 통하여 인도의 나란다대학에서 다르마굽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법맥을 상승 받은 인물이다. 선무외로부터 대일경 계통의 밀법을 전승 받은 그의 도반 중에는 신라출신의 현초, 의림이 있다. 다행히도 불가사의의 경우, 저작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그의 사상과 교리에 대해서 기술할 여지가 있다. 그는 선무외로부터 밀법을 전수 받은 후, 자신의 밀교행자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 번째로 밀교행자는 항상 청정한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에 투영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분노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여 사리의 판단을 올바로 했을 때,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태에서 중생에게 이익을 베풀 때는 환희심을 일으켜서 적절히 버릴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자비행이 나올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를 적절히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스승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을 일으켜야 온전한 법맥이 전승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자제할 줄 모르는 마음은 만인들로부터 의리와 신뢰를 잃을 수 있으며, 비윤리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씨앗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세를 지닌 자만이 부처님의 단을 건립하고, 참회를 하며, 불보살의 세계에 들어가 스스로 불보살의 입장에서 만인에게 증익을 베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의 대략적인 수행자관이고, 본론에 들어가면 밀교행법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는 인도에서 전승된 이와 같은 밀교의 행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역사적 배경도 있겠지만 우리와는 달리 티베트나 일본의 경우는 부단히 사자상승의 법맥을 계승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보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그의 밀교행법 연구가 우리 나라 밀교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저작이 대일경의 교리를 행법화 하는데 공헌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원래 밀교의 경전은 행법의 지침서인 의궤나 소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의 소는 대일경의 전체내용을 행법에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시켜 놓고 있다. 앞으로 우리들은 우리 나라 밀교의 실정을 반영하면서 현존하고 있는 불가사의 아사리의 저작을 통하여 그의 행법을 연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