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8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5-21  | 수정 : 200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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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밀교유포 큰 업적 1. 생애와 업적 혜초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왕오천축국전에 실려 있는 내용과 그가 번역한 경전의 서문, 불공삼장의 유서 등에 의해서 파악될 뿐 별다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생몰연대는 주변자료를 통하여 대략 700년경에 태어나서 780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그가 남긴 교훈은 인도구법 순례여행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불교도들에게 불굴의 구도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인도 유가부 밀교의 전승자로서 동아시아 밀교의 전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통일신라 불교 발전에 생동감과 활력을 불어넣었던 구법승 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구도열정은 중국에 그치지 않고, 불법의 본고장인 인도에까지 가서 당시 인도불교의 사정을 몸소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720년경부터 728년경까지 인도와 서역을 구법 순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이것은 당대 그 지역의 불교계 상황과 지리 환경, 그리고 풍습과 특산물, 언어와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백과사전적 성격의 기록으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가 밀교의 전승자가 된 것은 신라불교 초기부터 저변에 흘러 왔던 밀교적 성향의 신앙형태가 통일신라기에 이르러 거국적 불교의식을 통해 사회전체에 상당한 기반을 쌓은 상태였고, 그 자신이 스스로 인도를 편력하며 당시 성행하던 밀교를 직접 목도한데 기인한다. 그의 밀교에 대한 구도의지는 굳건하여 구법순례 후에는 중국 밀교의 기틀을 마련한 금강지와 불공삼장에게 차례로 수학하여 밀교의 대가들과 나란히 주도적인 활동을 펼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범어 실력으로 스승과 함께 밀교경전을 번역하였고, 경전에 대한 연구를 반세기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런 열정적인 전법 자세를 기반으로 만년에는 오대산에 들어가서 밀교행법의 체득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비록 신라에 귀국하지는 못하였지만 혜초의 이러한 활동은 신라불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 구도의 길 혜초는 당나라 남부의 광주에서 해로를 통하여 인도에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인도구법승들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출항하여 한 달쯤 걸려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일정 기간 체류하며 열대 기후에 적응하면서 현지어와 범어를 습득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도 역대 구법승들의 행로를 따라서 720년 캘커타 서남방의 탐라립티에 상륙하여 맨 먼저 바이샬리를 순례하고, 이어서 부처님의 숨결이 서려 있는 쿠시나가라에서 바라나시를 거쳐 두달 동안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중인도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고 있던 서인도의 펀잡과 카슈미르지방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서부티베트의 발티스탄, 레등에서 전개되고 있는 불교계 사정을 들었다. 또 725년 가을부터 726년 봄에 걸쳐서 간다라를 돌아보고, 당시 밀교가 성행하고 있던 우디야나에 들어갔으며, 바미얀의 불적도 둘러보았다. 727년에는 당나라의 영향권에 있던 카쉬가르와 구차에 이르렀다. 그는 다시 천산북로를 따라 고창과 돈황을 거쳐 728년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정 중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티베트서부지역에 해당하는 발티스탄, 레등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티베트 역사 속에서 서부지역은 인도의 밀교승들이 인도와 티베트를 왕래하던 통로였다. 그 뿐만 아니라 티베트 내에서도 닝마파가 세력을 강화해가고 있었으며, 700년대 중반에는 우디야나출신의 파드마삼바마가 티베트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혜초가 순례할 당시 이들 지역에서 밀교계승려나 사원을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혜초가 머물렀던 우디야나는 그 이후 13세기초까지도 금강정경계의 밀교가 융성한 지역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혜초는 당시 싹트기 시작한 유가부밀교를 직접 접할 수 있었고, 중국에 들어 와서 선무외의 행부밀교보다는 금강지나 불공과 같은 유가부밀교의 전승자들에게 친근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3. 밀교의 상승 혜초가 본격적으로 밀교의 상승자가 된 것은 인도에서 돌아 온 이후의 일이었다. 그는 장안에 돌아 와서 5년이 지난 후인 733년 천복사에서 금강지삼장의 문하에 들어가서 대승유가금강오지존법, 천비천수천발불석가법, 비밀삼마지법교, 대승유가만수실리경법을 전수 받았다. 그는 법을 전수 받은 뒤 8년간 삼장의 곁을 떠나지 않고 행법의 전수에 전념했으며, 급기야 740년에는 현종의 칙명으로 이들 범본 밀교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금강지가 구연하고 혜초가 필수하여 작업을 마쳤다. 그후 혜초는 742년 금강지삼장이 입적하자 774년 대흥선사에서 그의 제자인 불공삼장에게 유가심지비밀법문을 전수 받았다. 이것은 금강지로부터 불공에게 전수된 사자상승의 비의를 밝힌 법문이었다. 그 법문의 내용은 "모든 부처님은 삼라만상의 형태로 나타나 계시기 때문에 행자가 마음을 모아 추구하면 자기 자신이 갖춘 지혜의 거울에 확연히 드러난다. 아울러 지혜의 거울 속에 삼라만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 두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깊이 들어 갈 수 있다. 그와 같이 깨달음의 산봉우리에 올라서 삿된 집착을 물리치고, 삼밀을 바르게 닦으면 유가의 비밀스런 법문을 체득할 수 있다. 원리에 입각하여 지혜를 가지고, 계·정·혜의 3학을 닦고 지니게 되면 여래들의 경지를 증득한다. 믿음을 우선으로 하여 반야의 배에 타게 되면 빨리 피안에 도달한다. 성스런 깨달음은 모남이 없으며, 신통스런 힘이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불공은 입적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에서 자신의 뒤를 어어 밀법를 부촉할 제자 여섯 명을 거명 하였는데 여기에서 인도에 함께 데려갔던 함광을 비롯하여 신라의 혜초, 당나라의 혜과와 혜랑 등을 들고 있다. 불공의 육대제자중 한명인 혜초는 대흥선사에서 당나라의 혜랑과 함께 밀교의식의 주관자가 되어 법을 집행하였다. 이것은 그가 당대 밀교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혜초 자신이 하옥녀담기우표를 지어 올린 것을 보면 그 자신이 당나라 왕실의 외호 아래 국가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 기우도량을 개설하고, 그것의 주관자가 되어 의식을 집행했던 중심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역경사업과 밀교경전의 연구, 의식의 주관자로써 당나라 왕실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780년에 돌연 오대산에 들어가 밀법체득에 전념하였다. 그가 오대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일찍이 불공이 오랫동안 체류하였고, 동문들이 그 곳에 머물며 밀교를 홍포하던 성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혜초는 그 곳 건원보리사에서 대승유가대교왕경에 대한 역경의 연기와 경의 깊은 뜻, 문수보살의 덕 등을 기술한 경의 서를 지었다. 이것은 그가 금강지로부터 이 경을 전수하고 나서 48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혜초는 스승인 금강지와 불공의 뜻을 져버리지 않고, 이 경의 뜻을 널리 펴고자 하였으니 혜초의 사상적 바탕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