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1

편집부   
입력 : 2014-10-31  | 수정 :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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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나 버리고 참나 찾아야

“나[我]를 버릴 것이다. 나[我]는 죄의 근본이며 인연의 근본이다. 참된 나[眞我]를 찾기 위하여 헛된 나[假我]를 버려야 한다. 맹장염에 걸려 수술해야할 때 내 몸의 것을 떼 내고 수술을 해야 건강한 몸이 된다. 헛된 나를 버리는 것은 이 수술과 같다. 참된 나를 찾아야 한다.”(‘실행론’ 제2편 제4장 제2절 다)

비워야 산다


종이상자 하나가 시작이었다.
종이상자 하나가 강씨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고 크기도 적당하게 좋아 보였던 종이상자는 강씨 할머니 마음에 쏙 들었다. 강씨 할머니는 종이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안쪽을 골똘하게 살펴보았다. 뚫어지거나 찢어진 곳이 없었다. 물고기 비늘이 일어나듯 겉면에 들고일어난 흔적도 안 보였다. 말끔했다. 강씨 할머니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옆면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앉은뱅이처럼 종이상자 주변으로 돌면서 매의 눈으로 하나 하나 뜯어보았다. 완벽했다. 포장을 해서 묶었을 법한 밴드자국 하나 없었다. 손톱 자국 하나라도 있을 법한데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새것이었다.
강씨 할머니는 만면에 미소를 함빡 지으면서 요모조모 궁리를 시작했다. 어디에 갔다두고 어떻게 쓸까, 장고를 거듭했다. 외손녀가 첫 월급을 탔다면서 사다주었던 빨간 내의를 받았을 때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 외손녀를 보는 듯해 종이상자가 더 예뻐 보였다. 강씨 할머니는 오랜 생각 끝에 종이상자를 들고 일어서려다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혹시 잃어버렸던 사람이 찾으려고 다가오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종이상자를 내다버렸을 리는 만무해 보였다.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드는 종이상자를 길에 내버려두고 미련 없이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씨 할머니는 좀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기다리다보면 주인이 나타나든지, 버려진 것으로 드러나든지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종이상자를 집으로 들여놓은 강씨 할머니는 그 다음날부터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 미처 몰랐던 재미가 쏠쏠했다. 어릴 적 대다수의 소녀들이 흔하게 했던 우표수집은커녕 낙엽을 모아 책갈피에 끼우는 것도 한 번 해보지 않았던 강씨 할머니로서는 의외의 사건이었다. 학교숙제로 무엇을 모아오라고 할 때면 문방구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사서 가져갔다.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나, 손이 가야 하는 것은 어머니를 도와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밥을 하고 빨래를 하던 식모가 대신해주었다. 그랬던 강씨 할머니에게 때늦은 수집벽이 생긴 것이다.

종이상자로 시작한 강씨 할머니의 수집벽은 나날이 커가면서 경험이 쌓이고 수완이 좋아져 수집업계의 내로라 할 능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종이박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책이며 신문지 등 종이류를 비롯해 비닐, 캔, 병, 철근, 심지어 돌멩이까지 눈에 보이고 손에 짚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낚아챘다. 쌍끌이 어선이 바다 속을 헤집으며 어린 물고기까지 싹쓸이하듯이, 길 위에서 나뒹구는 것은 모두 강씨 할머니의 수집대상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수집하는 물건의 양이나 부피도 점점 많아져 맨손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다 싶던 차에, 마침 버려진 유모차를 발견한 것은 천우신조를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강씨 할머니는 유모차를 이용해 오전에 두 차례, 오후에 두 차례, 하루 네 차례씩 집으로 길거리 수집품을 모아 날랐다. 모으는 재미에, 일일이 들고 이고 날라야 하는 수고를 대신해줄 유모차가 있어 크게 힘도 들지 않아 강씨 할머니의 수집바람은 하늘이 돕고 땅이 길을 내어준 것처럼 활기를 띄었다. 수집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창고 하나가 가득 차 올랐다. 강씨 할머니는 궁리를 하다가 세를 주고 있는, 창고 옆 미장원을 찾아가 비워달라고 했다. 미장원 주인은 선뜻 그렇게 하겠다면서 전세금을 빨리 빼달라고 했다. 강씨 할머니가 그렇게 하겠다면서 미장원을 나설 때 “그러잖아도 창고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골머리를 앓았다”면서 미장원 주인여자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좋아했다.

길거리 수집품으로 창고가 가득 차고, 갓 비워준 미장원 자리가 반쯤 여유공간을 남기고 있을 때 이번에는 미장원을 했던 옆 점포에 세 들어 있던 농약방과 자전거방을 동시에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면서 강씨 할머니의 마음은 더 풍성해졌다. 주워 모아야 할 것은 태산인데, 쌓아둘 곳이 마땅찮아 걱정을 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강씨 할머니는 2층집을 갖고 있었다. 1층은 세를 놓을 수 있는 점포가 4개나 되고, 2층은 살림집과 정원처럼 활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며, 살림집 위 옥상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강씨 할머니는 그동안 망각했던 부자가 된 기분을 새삼 실감했다. 늘어나는 길거리 수집품을 보면서 그랬고, 그것들을 쌓아둘 공간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한 번 더 우쭐했다.

길거리를 쓸다시피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수집품을 모아왔던 강씨 할머니에게 동네사람들의 원성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채 6개월이 되지 않아서였다. 수집품으로 1층 점포 네 곳을 모두 채우고, 2층 살림집 앞 너른 공간과 살림집 위 옥상까지 가득 들어찼을 때였다. 누울 자리도 변변찮을 정도로 살림집은 말할 것도 없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예외 업이 수집품 투성이가 됐을 때였다. 급기야 동네사람들로부터 귀신 나오겠다느니, 냄새 때문에 도저히 살수가 없다느니, 온갖 질타가 이어지면서 구청에서도 여러 차례 나와 청소를 해주겠다며 강씨 할머니를 회유했다. 그럴 때마다 강씨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온몸으로 막고 나섰다. ‘돈이 될만하니 구청에서 거저 가져가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악다구니를 썼다.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길거리 수집품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것을 허락 없이 함부로 처분할 수는 없었던 터라 구청 직원들도 난감해 했다.

그렇게도 완강하게 버티던 강씨 할머니가 그동안 모아온 길거리 수집품을 포기한 것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나서였다. 어떤 사람의 접근조차 외면하면서 집안으로는 절대로 사람을 들이지 않던 강씨 할머니가 구청 여직원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넘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서부터 치료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구청 여직원은 담당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찮게 엿듣고 몇 날 며칠을 고민 한 끝에 강씨 할머니를 찾아갔다.

강씨 할머니를 처음 찾아간 구청 여직원 역시 강씨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으나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아무 소리도 않고 팔을 걷어 부친 채 강씨 할머니를 따라 다녔다. 길거리 수집품을 모으고, 유모차로 나르기도 하고, 더럽고 비좁은 공간에서 같이 밥도 먹으며, 심지어 잠까지 자면서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어르고 달래며 지난한 과정을 거뜬히 견뎠다. 한 달 만이었다. 강씨 할머니는 한 달을 지켜본 뒤에야 마음을 열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있으나마나 생각했던 딸처럼 구청 여직원을 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청에서 청소차를 동원해 강씨 할머니의 집에 켜켜이 쌓였던 그 많은 길거리 수집품을 모두 들어내고, 집 수리기사를 불러 말끔하게 정리까지 마치자 넓디넓은, 대궐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날도 구청 여직원은 허전해할지도 모를 마음을 달래주려고 강씨 할머니와 같이 잠을 자면서 찌들고 멍들었을 마음을 달랬다.
"고마워 색시. 내 평생에……. 이제 다 끝났지. 지 년이야 오던 말던 내 알 바 아이다."
강씨 할머니는 크게 숨을 한 번 몰아 쉬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쓰레기더미를 비워낸 방은 한없이 넓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