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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 행하는 행복한 삶을 살자”

편집부   
입력 : 2014-11-17  | 수정 :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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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원장 회정 정사 정지심인당 초청법회

오늘은 우리 진각종의 수행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먼저 일반 불교 사찰에 가면 불상을 모시고 부처님께 어떤 것을 해달라고 바란다. 그런데 제가 50여년 부처님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부처님이 해주시는 것은 없다. 결국 내 자신에게 달려있지 부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할 때 그것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하지도 않고 부처님께서 내놓으라고만 해서는 소용없다.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모든 분들은 부처님이다. 내 마음속에 나의 양심은 곧 나의 비로자나부처님이다. 이것을 곧 불교적으로 말하면 진각종에서는 ‘심인’이요, 현교에서는 ‘불성’이라고 한다.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는 사랑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자기 자신은 폄하하고 잘난 사람을 우러러 보고 좋아한다.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껍데기가 아닌 참 자신, 바로 본성, 불성, 양심, 심인을 사랑해야 한다. 종조님은 심인을 사랑하는 수행이 심공이라고 하셨다.

진언행자들은 다 알고 있는 회향참회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회향참회는 ‘오불 사바라밀 십육대보살 팔공양 사섭에 귀명하나이다’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삼십칠존 불보살과 똑같은 삶을 살겠다는 마음의 다짐이다. 그것이 귀명이다. 귀의와 귀명의 차이를 잘 이해한다. 귀의는 부처님께 의지한다는 것이다. 귀명은 내 목숨을 다해 부처님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그렇다면 삼심칠존 불보살은 어떤 삶을 사는가? 상호 공양하고, 상호 존경하는 삶을 산다. 삼십칠존 불보살의 덕상은 남들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은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 없애고’라고 한다. 이 탐심, 진심, 치심 삼독은 부처님이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부모에게 복업짓고’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이다. 부모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윤리가 없고, 도덕이 없고, 인성이 바닥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부모를 부모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녀의 문제이고, 결국 그러한 자녀의 문제는 바로 또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부모 같을 때 자식이 자식 같아지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나한테 책임이 있다. 다 자식으로 태어나 어느새 부모가 되어간다.

이어 ‘부군에게 유순하면 자녀들이 수순하고 창성하게 되나이다’고 했다. 이는 종조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인이 되어 남편을 잘 받들고 섬길 때에 자녀도 그에 맞게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 부인이 남편의 기를 살려줬을 때 남편이 그 가정을 잘 이끌어갈 수 있고,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 또한 남편은 남편의 의무를 다 했을 때에 가정이 제대로 선다. 인성은 가정에서 부모가, 형제자매를 통해 배워가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삼보에게 단시하여 가정안에 빈곤없게 하겠으며’는 남편들은 삼보에게 단시, 즉 보시한다는 말이다. 베풀수록 돌아오는 것이다. 베풀어서 가정에 빈곤아 없게 하는 것이다.

이어 ‘항상 삼밀을 행하여’라고 한다. 삼밀은 손으로 결인, 입으로는 진실 된 말(육자진언)을 하고, 생각으로는 늘 부처님을 그려본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곧 나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자. 생각이 있으므로 몸과 입이 움직인다. 이어 ‘뜻으로 악한 마음과 입으로 악한 말과 몸으로 악한 행동을 결정코 끊어 없애겠으며’라고 했다. 삼업을 짓지 말자. 종조님은 마음 바로 쓰는 법을 강조하셨다. 마음을 바로 쓰는 방법은 바로 양심대로 살면 된다. 내 생각이 부처님과 같아지고, 내가 하는 말이 부처님과 같아지고, 내가하는 행동이 부처님과 같아지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곧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자녀들의(상대방의) 저허물은 내허물의 그림자라’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말이다. 자녀들의 허물은 다 부모의 잘못이다. 부모가 낳은 자녀는 부모가 책임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이 바로 내 잘못이다. 내가 없으면 그 잘못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잘못이 곧 부인의 잘못이다.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다툼이 없어진다. 미움과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행복과 불행도 둘이 아니다. 우리 인생은 고도 반이고, 낙도 반이다. 49%의 불행과 51%의 행복한 세상이라면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1%의 지족, 만족으로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종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최고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행해야 한다. 알지 못하고 잘못 믿다보면 맹신이 되어버린다. 종교의 가르침을 알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그것이 참 종교이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누가 얼마나 실천하고 있느냐가 큰 차이 일 것이다. 진각종은 생활불교, 실천불교이다. 우리들 생활 속에서 남편 잘 모시고, 자녀 잘 키우고, 이웃과 소통하며 잘 지내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종교이다. 가정이 불화하고 이웃과도 다투면서 부처님 앞에 와서는 다 잘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누구도 탓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 원망하고 탓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불행해진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혜, 자비심 아무리 쓴다고 해도 줄어지는 것이 아니다. 쓰면 쓰는 만큼 다시 늘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심이다. 살아있을 때, 쓸 수 있을 때 써야한다. 죽고 나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 수도 있고,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다. 좋은 일이 나에게 오던, 좋지 않은 일이 나에게 오던 가슴 활짝 열고 껴안아라. 그것은 모두 인연의 이치로 오는 것이다. 모두 나를 깨우치기 위해 오는 일들이다. 집에 도둑이 들었으면, 그걸로 감사해야 한다. 만약에 사람이 있을 때 도둑이 들어왔으면, 혹시나 사람을 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왜 가져갔을까 생각해보자. 물질이 들어왔으면 들어온 만큼 내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못에 물이 가득 찼는데 아까워서 흘려보지 못하면 둑이 터져버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내 마음속의 탐욕이 없어지고 진애가 없어지면 재난이 없어진다. 재난이 없어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 많아지는 것이다. 즐거움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불작불행(佛作佛行)해야 한다. 부처님의 작업을 하고 부처님의 행동을 하면 즐거움은 더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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