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57

허일범 교수   
입력 : 2004-02-25  | 수정 : 2004-02-25
+ -
(계룡산 중악단의 수호존 금강역사) 1. 금강역사의 검 밀교는 만다라적 세계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출현하였기 때문에 출세간적인 가르침은 물론 세간적인 문명과 문화까지도 불보살의 세계로 승화시키려고 힘썼다. 또한 불보살의 세계를 인간세계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교리와 신행체계를 인간 개개인의 입장에서 접근하기 쉽도록 방편을 구경으로 삼은 면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밀교에는 경전의 종류도 많고, 불보살의 수도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표현방식은 크게 나누어 신구의 또는 형상과 문자와 상징으로 분류되며, 그 중에서 상징은 삼매야형이라고 부른다. 그 삼매야형 중에서 금강역사나 문수보살이 지니고 있는 검(劍)은 자비와 지혜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검이라고 하면 무사들이 들고 다니는 검을 연상하게 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검은 싸움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쓰이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때, 또는 형벌을 가할 때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를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불보살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상징물로 활용하고 있다. 밀교에서 검은 번뇌를 부수는 지혜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혜의 검, 또는 금강의 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검에는 자비로부터 나오는 힘을 상징하는 검과 지혜로부터 나오는 힘을 상징하는 검의 두 종류가 있다. 여기서 자비의 검은 허공장보살이나 대용맹보살이 지니고 있는 지물(持物)이며, 지혜의 검은 마군을 퇴치하는 힘의 상징으로 문수보살, 금강리보살, 부동명왕, 금강역사 등이 지니고 있다. 우리들은 이것을 지혜의 칼이라는 뜻으로 혜도(慧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군퇴치의 상징으로 쓸 때를 제외하고 자비의 상징으로 검을 쓰는 예는 발견하기 힘들다. 또한 존격의 종류가 티베트나 몽골, 일본 등에 비하여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현방식에서도 제한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검을 가진 존상을 분노존의 형상에서만 찾을 수 있고, 그것은 사찰이나 전각을 수호하는 의미에 국한되어 있다. 그 중에서 사천왕은 분노존으로 하여금 도량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금강역사는 사천왕의 내측에서 불보살과 수행자를 수호하는 책무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사천왕과 금강역사를 각각 다른 전각에 봉안하여 사천왕은 천왕문, 금강역사는 금강문에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석굴의 전면, 본당의 벽면, 전각의 중문 등에 그려 넣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 중국의 경우는 흔히 사천왕과 금강역사를 단일 전각의 전면과 후면에 배치하고 있다. 한편 티베트에서는 사천왕이나 금강역사를 본당의 벽면에 그려 넣기도 한다. 하여튼 분노한 모습에 검을 들고 있는 이들 존상은 어떤 의미에서든 불의 자비와 지혜를 근간으로 해서 불법을 수호하고, 도량과 수행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금강역사의 역할 계룡산의 중악단은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삼대 산신단이다. 현재에는 이들 삼대 산신단 중에서 상악단과 하악단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중악단 만이 조선말기에 복원되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그 중악단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 금강역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현 상태에서 그 형상을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사진을 통해서는 그 전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밀교에서 존격의 표현방식은 일반적으로 존형과 종자와 삼매야형이다. 여기서 존형의 경우는 존격의 형상을 그대로 나타낸 것을 의미하며, 거기서 존형은 대부분 지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형과 삼매야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특별한 예이기는 하지만 부동명왕의 모습에 삼매야형인 검을 들고, 종자자인 함맘(ham mam)자로 된 법의를 걸치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다. 그리고 티베트 사찰의 벽면에서와 같이 삼매야형 만으로 존격을 나타낸 예를 발견할 수도 있다. 여기서 공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의 금강역사는 검을 들고, 분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금강역사의 봉안양식과는 달리 짝을 맞추어 그 역할을 각각 분담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원래 신원사의 중악단은 계룡산의 산신을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에 산제를 지내는데 쓰였다. 흔히 사찰에서 산신은 산신각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지만 이 곳은 국가적으로 산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전각의 건축양식에서부터 장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산신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대하다. 여기서 우리들은 궁궐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정면 중문에서 검을 치켜세운 모습의 금강역사와 검을 허리에 찬 모습의 금강역사 채색화를 발견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두 존은 무사의 모습을 한 금강역사와 판관의 모습을 한 분노형 금강역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판관형의 금강역사는 무사의 갑옷에 두건을 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사와 판관의 모습으로 표현된 금강역사의 예는 우리나라의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금강역사의 역할을 두 가지로 분화시켜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신원사 중악단에서 그들의 역할은 통상적인 금강역사의 역할과는 달리 중문을 통과하는 자들을 사악취택하고, 장애가 되는 존재들을 퇴치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판관의 모습을 한 금강역사는 들여보낼 자와 들여보내지 말아야할 자를 가리며, 검을 든 금강역사는 교령륜신으로 자비를 근간으로 한 지혜력에 의거하여 사악취택한 자를 단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계룡산 중악단 중문의 금강역사는 우리나라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회통하는 과정 속에서 수용된 산신제단의 수호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