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9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5-31  | 수정 : 200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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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초와 의림 1. 생애와 법맥의 전승 현초와 의림 아사리의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략 8세기초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무외삼장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서기726년부터 735년 사이에 복선사(福先寺)에서 대일경법과 소실지법, 허공장구문지법을 전수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제자의 양성에도 힘써 당나라의 혜과와 순효에게 각각 선무외삼장으로부터 전승 받은 법을 전하여 중국 밀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선무외삼장이 인도 중기 밀교의 중국 전래자라면 현초와 의림은 스승의 가르침을 당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이웃의 우리 나라와 일본에 그 법이 전해지게 한 인물이다. 이들의 제자인 혜과와 순효는 일본의 밀교종파를 세운 공해와 최징을 길러 냈고, 법맥은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진언종과 천태종을 통하여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한편 현초의 손제자이자 혜과의 제자였던 신라의 혜일과 오진은 본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고, 오진은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나 돌아오던 중 티베트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초와 의림은 다 같이 선무외삼장의 제자이면서도 교리를 확립하는데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현초는 밀교경전을 근간으로 해서 교리를 확립하려는 성향이 강한 반면 의림은 대승불교와 밀교의 회통을 도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그의 법맥을 계승한 유파들에서 나타난다. 현초의 법맥을 계승한 혜과와 그의 제자인 혜일, 오진, 공해 등은 초대승적인 입장에서 밀교를 이해하려했다. 이에 대하여 의림의 법맥을 계승한 순효와 그의 제자인 최징은 대승의 입장을 근간으로 하여 밀교의 수행법을 도입한 새로운 양상의 밀교를 구축하려했다. 그들의 서로 다른 입장은 훗날 일본에 전해진 후,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초 계통의 일본 진언종은 소의경전을 대일경, 금강정경으로 삼고, 그 행법도 경전의 내용에 충실하려했다. 그 결과 그들의 중심적 수행체계라고 할 수 있는 사도가행차제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었다. 의림계통의 일본 천태종은 법화경을 근간으로 삼고, 행법은 진언종으로부터 채용하였다. 그 결과 법화와 밀교가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의 신행체계를 완성하였다. 나아가서 교주에 대해서도 진언종의 경우, 대일여래와 석가모니는 동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면, 천태종은 대일여래와 석가모니는 동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것은 교학적인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대일여래와 석가모니가 동체일 경우, 대승과 밀교는 동일한 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별체라면 대승과 밀교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입장이 된다. 우리들은 이러한 일본밀교의 입장이 신라의 현초와 의림 두 아사리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아가서 이들 두 인물 중 현초 아사리는 신라에 귀국하였다는 증거가 없지만 본국에 귀국하여 103세의 나이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지는 의림 아사리는 당시 화엄일색의 신라불교계에서도 무리 없이 전법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즉 당시 신라의 불교계는 화엄계통의 인물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교와 밀교를 회통하려한 의림은 자연스럽게 밀교를 홍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교학의 역사적 전개 현초 계통의 밀교는 대일경의 교리를 중심으로 해서 금강정경의 행법이 도입된 형태로 전개되고, 의림의 밀교는 대승적 측면에서 대일경의 교리와 소실지경의 행법이 가미되어 전개된다. 이것은 두 아사리의 제자들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혜과의 경우는 현초 아사리 밑에서 수학한 후, 불공 아사리로부터도 교리와 행법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나서 혜과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교리를 종합하여 중국 밀교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순효는 오직 의림 아사리의 교리와 행법을 전 수받았고, 대승불교의 이념과 대일경의 교리를 중심으로 소실지경의 행법을 채용하여 교학체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인도밀교는 중국적 특색을 띤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한편 신라에는 선무외로부터 현초와 의림을 거쳐 전승된 대일경계의 두 가지 양상을 띤 밀교가 전파되면서 화엄일색의 신라불교계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현 단계에서 신라의 화엄과 밀교간의 교섭이나 갈등에 관한 사적 자료는 발견할 수 없지만 문화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밀교적 사고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음에는 틀림이 없다. 먼저 불상의 조성에 나타난 밀교적 특색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불상 가운데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현존하는 형태의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것은 화엄과 밀교의 습합에 의한 것이다. 여래의 모습을 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를 제외하고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선무외삼장이 입당한 후, 도화한 밀교계 비로자나의 모습은 여래형에 지권인이 아닌 법계정인을 결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경전의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대일경의 영향을 받은 비로자나의 모습이다. 한편 신라에서 조성된 비로자나의 모습은 석존의 모습에 금강정경계의 유기경에 설해진 비로자나의 인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선무외의 태장도상과 금강정경계 밀교의 영향이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모습이다. 다음으로 오불오존의 전개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대산신앙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의 경우, 오대산은 금강정경계통을 계승한 밀교승들의 중요한 수행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오대산도 자장스님이래 문수신앙의 중심지였고, 보천과 효명에 의하여 오악에 오존과 오색을 배대하는 양상이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이와 같은 존격의 배대방식은 밀교경전의 체계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형식적으로 밀교경전의 오색오불배당방식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훗날 석탑의 건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동화사 비로암의 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에 나타낸 중앙의 불사리와 탑신의 사방에 새겨져 있는 사방불은 화엄경의 법신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인도 행부밀교의 존형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의 불사리는 불의 법체를 의미하며, 북방의 마하비로자나를 비롯한 무량수, 보생, 아축불은 가지신과 수용신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체계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법신을 본지신으로 보고, 마하비로자나를 가지신으로 보는 선무외삼장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들은 부족하나마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선무외삼장의 제자인 현초나 의림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불교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가까운 일본에는 종파를 형성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