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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댄스

밀교신문   
입력 :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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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아들과 둘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여행을 떠났다. 뮤지컬 영화 왕과 나로 유명한 율브리너의 생가를 찾았다. 잠시 영화의 한 장면인 쉘 위 댄스를 떠올리며 율브리너의 동상 뒷모습만 봐도 참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들과 함께 오니 참 좋다고 여행의 의미도 부여했다.

 

그러나 저녁에 아르바트 거리에서 맥주 한 잔을 하며 이국의 정취를 느끼려는데 아들이 불쑥 한마디 한다. 아빠와 함께 여행한다니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필자의 반응에 뭔가 서로 불편한 게 있겠지 세대차이 같은, 하고 웃는다. 주체가 아들이 아니라는 모호함을 빌미로, 우리는 언제든 같이 여행 가자, 라며 호기롭게 잔을 부딪쳤다. 이 즉흥적인 제안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축적된 성향과 기호가 있다. 그것은 권위나 당위로 강요할 수 없다. 여행지에서 아침 일찍 서둘러 일정을 시작하려는 경우와 늦잠을 자고 좀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려는 경우는 참으로 사소한 차이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별전을 보고 난 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정하는 것도, 번화가를 활보할 것인지 바닷가를 완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도 참으로 사소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과정의 사소한 대화가 존중받지 못할 때 풍요로운 여행길이 되기란 쉽지 않다.

 

사실 가족 관계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있을까 싶다가도 가장 가까운 가족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데 동의한다. 비교적 감정이입이 잘 된다는 엄마와 딸 사이에도 가장 모진 언어로 고통의 다리를 놓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어느 노시인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아직 우리의 존재는 모래알처럼 작고 서툴다. 모래알보다 작은 인간들이 사회적 담론이나 책읽기 습관과 같은 그럴듯한 화제도 아닌데 실내 온도를 어느 정도로 맞추어야 하는지, 모자는 어떤 모양으로 갖추어 써야하는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그런데 가까운 사람끼리 돌아서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기 전에는 상대의 가슴에 못 박기도 서슴지 않는다.

 

어쩌면 지난 세월 무엇이든 빠른 성과를 내어야 했으므로 상대의 강점을 찾기보다 상대의 약점을 지적하기에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왜 저 사람은 망고 스무디를 마시며 요란하게 소리를 낼까가 아니라 저 사람은 다리를 저는 고양이가 지나가기 전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지켜보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상대와의 사소한 차이가 불편할 정도라면 일단 욕을 하거나 무시하기 이전에 시간을 들여 대화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해나 관계의 나무는 기다림 끝에 피어난다.

 

생각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파동이 존재한다. 주위에 정지해 있는 책상과 나무와 커피 잔도 마찬가지이다. 파동은 진동이 공간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서로 다른 두 대상의 주파수가 동일하게 되는 것을 공명이라고 한다. 우리가 가족관계이든 연인관계이든 직장의 동료관계이든 공명 없이는 어떤 길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제대로 된 공명을 위해서는 내 주파수를 상대에게 맞추기 위한 공감능력이 있어야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과 삶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잘못 공명하여 파국이 오기 전에 생각해봐야겠다. 공명과 공감은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 힘들 때 위로가 되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 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거리는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이다. 갑자기 율브리너가 당신의 경청능력은 어느 정도이냐고 묻는 것만 같다. 쉘 위 댄스?

 

한상권/심인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