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대승적 삶을 살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하나요?

밀교신문   
입력 :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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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용어에 강박적 숙고라는 게 있습니다. 생명이나 죽음, 우주 같은 문제에 대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문을 가지고 집착하는 걸 말해요. 아마도 살아가면서 이러한 의문에 한 번도 사로잡혀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왜 하필 한국에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지금의 이름으로 태어나 내 눈을 통해 존재하는 세상만을 보고 있는가하고 말이지요.

러나 붓다께서는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무관하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바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그 독화살을 쏘았으며 왜 쏘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치료와 응급처치라고 단호하게 야단을 치신 거예요. 독화살을 맞고도 화살부터 뽑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따지다가는 답을 얻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만다는 거였지요. 풀리지도 않는 미스테리한 의문에 한없이 집착하는 중생의 습성을 버리라는 귀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는 어느 보험사의 광고 문구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상 분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자고 스스로에 다짐하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인생이란 결국 자기의 존재 의미를 찾아서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는 과정일테니까요. 어느 날 문득 치열했던 인생의 모든 위기와 도전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되면 그때까지 계산에 없던 삶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하는 버거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무관심해도 되는 일에 관여하면서부터 자기 삶은 더 초라하고 복잡해지게 될 게 분명해요.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때는 현명하게 판단해서 적절한 충고를 해 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라도 그게 내 문제로 다가오면 그만 속수무책이 되곤 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욕심에 가려서 집착한 나머지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렇듯 모든 고통은 개인의 욕심에서 빚어집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집착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나 기존의 편견에 대한 집착, 어떤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적 개념에 대한 집착, 자신의 즐거움이나 불행에 대한 집착, 결과에 대한 집착 등 집착이야말로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앎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가잖아요. 이렇게 개인적인 문제에 자꾸 집착하게 되면 생활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버립니다. 거리를 두지 않아 시야가 좁아지면 우리 눈은 사팔뜨기가 되어 자신의 문제만 보이게 될 거예요. 그러면 결국에는 문제가 더욱더 커다랗게 보이는 법이지요.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의 실천에 있습니다. 쾌락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말고, 동시에 고행만이 열반을 체험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옳게 보고, 극단으로 치우침이 없으면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번뇌가 사라지고 자비심이 생겨날 수 있어요. 즉 한쪽으로 치우치는 집착이 없어질수록 공()의 세계가 더 넓어지게 되어 현생에서 니르바나(열반)를 성취할 수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 고귀한 무관심이라고나 할까요?

 

대승적 삶을 살려면 어떠한 실천이 따라야 할지,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에 집착하게 되면 계박(繫縛)되어 고통하고 아()에 집착 아니하면 자재(自在)하여 해탈한다. 그러므로 이 아()에게 집착함이 중생이요, ()를 오직 멸하기만 하는 것이 소승이요, 소아에서 대아에로 세워감이 대승이라.”(실행론 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