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우포늪과 즉흥성의 시간

밀교신문   
입력 : 2019-12-16  | 수정 : 2020-01-31
+ -

thumb-20191028091022_f770ea3aba81957ed78885d51ce8aae9_8itw_220x.jpg

 

오랜만에 우포늪을 찾았다. 별 다른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떠나온 길이었다. 첫 직장생활을 창녕에서 시작한 터라 우포늪 가는 길은 심리적으로도 먼 길은 아니었다. ‘동트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느닷없이 달리는 낭만적 여정은 아닐지라도 1억 년 전에 빚어낸 이 천연의 습지에서 이정표 없이 걷고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도화지에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물속에 비친 산들과 바깥의 풍광이 조화롭고 신비롭다. 물 위를 낮게, 물 아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짝을 지어 날아가는 백로의 모습도 꽤 인상적이다. 물과 나무와 새들과 꽃들과 시작도 끝도 규정할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자니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물론 내 눈에 안 보인다고 내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들까지 마치 이곳이 인류의 시작점인가 하는 느낌,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할 때 여기서 걸으면 스멀스멀 생기가 오를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나의 일상엔 가끔씩 즉흥성이 개입한다. 즉흥적으로 떠나고 즉흥적으로 사고 즉흥적으로 읽는다. 그런데 이 즉흥성은 우연성과 예상 밖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무지개를 보거나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기도 한다.

 

런 마음으로 우포늪 대대제방을 걸으면서 천천히 우포늪 전체를 조망하면서 나의 지난 1년도 돌아보았다. 어느새 12월인데 어느 것 하나 계획대로 이뤄낸 것이 없는 것 같아 피식 쓴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 겨울에 즉흥적으로 우포늪에 와서 얻은 의외의 소득도 있다. 예기치 않은 우연성과 직면했을 때 감정은 특별해진다. 자연스럽게 열린 우포 생명길을 돌고 돌다가 도깨비풀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겨울이라 모든 것이 마르고 엷어져 눈에 잘 띄지도 않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우연히 본 것이다. 어린 시절 들판을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바지에 잔뜩 매달고 온 도깨비바늘을 떼어내던 기억도 새롭다.

 

도깨비바늘 가지 하나를 우포늪 쪽으로 놓고 클로즈업해 사진을 찍어보았다. 겨울이라 접착력은 떨어져도 도깨비바늘과 함께 우포늪의 새들과 주변 갈대의 고요한 흔들림까지 내게 달라붙을 것 같았다. 즉각적인 시각의 다채로움을 느끼면서 다시 걸었다.

 

지금껏 내가 외면하고 떼어내려고 애를 썼으나 도깨비바늘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들은 없었을까. 그것이 내 삶을 고단하게 했거나 어쩌면 풍요롭게 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린 시절엔 난감했지만 오늘은 일부러 도깨비풀을 앞세워 사진도 찍고 옷에 슬쩍 붙여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도꼬마리나 도깨비풀처럼 내게 붙어서 나의 삶이 된 시간과 사람과 일상성들이 고맙기도 하다.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의사가 운동을 권했다. 몸을 가볍게 해야 일의 능률도 오르니 규칙적으로 걷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걷는 일이야 호흡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습관이 되지 않으니 꾸준함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우포늪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우연의 일들은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삶에 지치다 보면 우연의 효과를 극대화해 본능적 감정을 담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우연을 바꾸어 필연을 만들어내는 의지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무모함과 부족함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새해엔 좀 더 여유롭게 그리고 좀 더 꾸준하게 걸어야겠다. 우포늪이 준 즉흥성과 우연의 시간을 가슴에 담고 다시 치열함과 축적의 시간인 대구로 돌아왔다.

 

한상권/심인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