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목욕하다(1)

밀교신문   
입력 :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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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는 왜 강에서 목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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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는다는 행위는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늘 하는 동작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씻는 일은 나름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씻는 일은 우리를 개운하게 해줍니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씻습니다. 집밖에서 묻혀온 온갖 먼지를 씻어냄은 물론이요, 사람들을 만나느라 마음에 쌓인 피로도 간단한 샤워로 말끔하게 씻겨나갑니다. 향긋한 목욕 비누가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너무 힘들 때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어제는 씻지도 않고 잠들었지 뭐야.”
 
씻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 수 없다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무튼 씻는다는 행위는 어느 사이 하루를 마감하는 거룩한 의식으로 자리했습니다. 저녁에 씻는 것이 거룩한 의식이라면 아침에 씻는 것은 활기찬 하루의 시작입니다. 잠에서 덜 깬 몸과 마음을 씻어야 맑은 정신으로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테니까요. 씻는다는 행위는 몸의 더러움을 벗겨내는 것 이상으로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손을 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과거의 일그러진 삶과 결별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지요.
 
종교 세계에서도 씻는 행위는 아주 중요한 의식입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 씻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은 이슬람교가 아닐까 합니다. 이슬람 사원 입구에는 어김없이 씻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하산 2세 사원을 방문했을 때 지하 출입구에 작고 아름다운 분수를 본 적이 있습니다. 텅 빈 사원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물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 작은 분수는 신자들이 사원에 들어가기 전 손과 발을 씻는 장소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루 다섯 번 예배를 올리는데 이 말은 적어도 하루 다섯 번은 손과 발, 입과 귀까지 깨끗하게 물로 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팔꿈치와 손톱 밑까지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 ‘우두’라고 불리는 이 세정의식은 몸의 먼지를 씻는 행위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진다는 이슬람교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한 파인 침례교는 신자의 몸을 완전히 물에 푹 담그는 세례의식을 합니다. 이 의식은 더러움을 씻는 단순한 뜻을 넘어 자신이 지은 죄를 씻어내서 그리스도의 자녀로 새로 태어남과 동시에 부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지요.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의 설날에 해당하는 절기인 로시 하샤나를 맞아 강이나 바다를 찾아가 깨끗한 물에 목욕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죄를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종교 세계에서는 위대한 존재와의 합일을 위해 스스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일이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올리는 기도는 맑고 깨끗한 몸과 마음이 우선 조건입니다. 그래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굽니다. 마음만 간절하면 그만인 게지 굳이 물로 씻는 과정이 필요한가 싶지만, 세상의 온갖 번뇌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때와 먼지를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의식에서 가장 많이 지송한다고 해도 좋을 천수경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천수경은 정구업진언으로 시작합니다.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하는 진언인데, 이때 ‘입으로 지은 업’이란 쉽게 말하면 ‘말’입니다. 이 입으로 쏟아낸 말들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양치하는 기분으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진언을 외웁니다. 물과 치약이 아닌 진언으로 입을 씻고, 그 깨끗해진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종교적 차원에서 씻는 행위는 이렇게 긍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전 속에서는 씻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말들을 하고 있을까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목욕과 관련해 어떤 일화를 남겨놓고 있을까요?
 
부처님의 최초 목욕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한 샤워입니다. 보통 갓 태어난 아기는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키는데 아기 싯다르타는 지상의 물이 아닌 천상의 물로 이번 생애 최초의 목욕을 마칩니다. 그것도 천상에서 저절로 한 줄기 따뜻한 물과 한줄기 시원한 물이 잘 섞여 내려와서 아기 태자의 몸을 부드럽게 씻겨주었다고 하지요. 이 목욕을 해드린 이들은 천상의 신이었습니다. 장차 부처님 되실 분에게 최초의 목욕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그 신들은 깨달음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룸비니에서의 최초 목욕 이래 부처님 일대기에서 목욕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바로 출가한 뒤 6년 동안의 고행을 마치는 바로 그 시점이지요. 고행한다는 것은 몸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할 수 있으면 극단적으로까지 몸을 괴롭혀 업 종자를 태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고행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꾸 괴롭고 불행해지는 것은 악업을 짓기 때문인데, 악업을 짓는 이유는 바로 업 종자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고행을 통해서 발생하는 그 열로 업 종자를 태워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하지요.
 
고행주의자들에게 목욕은 몸에 집착하는 타락행위였습니다. 몸에 집착한다는 것은 애욕과 성욕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목욕은 죄를 짓는 일이요, 따라서 죽을 때까지 목욕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업 종자를 태우기 전에 몸이 먼저 상하고 그러다 행복하고 개운한 해탈의 경지를 맛보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말 것만 같아서 싯다르타는 고행을 멈추겠노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강물로 들어갔지요.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과 잠, 어찌 보면 먹지도 자지도 눕지도 않던 고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불행을 초래하리라고 결론을 내린 고행자 싯다르타는 아주 천천히 강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단식과 고행을 이어온 터라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두 발로 걸어갈 엄두도 나지 않아 어쩌면 기다시피 앞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강물에 깨끗하게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싶었을 테지요. 천천히 강까지 다가간 싯다르타가 물에 몸을 담그자, 오랜 세월 온몸에 켜켜이 들러붙은 먼지와 때가 고행주의의 폐해와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부처님 일대기를 담고 있는 ‘방광대장엄경’이나 ‘과거현재인과경’, ‘불본행집경’, ‘불설보요경’에서는 이 장면을 종교적으로 아주 멋지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차 부처 되실 분께서 니련선(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시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어서 하늘의 신이 도와드렸다거나 나무 신이 스스로 나뭇가지를 늘어뜨려서 오랜 고행으로 기력을 잃은 싯다르타가 그것을 붙잡고 강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강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붙잡은 대목에서 ‘불본행집경’은 나무 신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팔을 내밀어 싯다르타를 도와주었다고 표현합니다. 같은 경에서는 강물에 들어가자 하늘에서 온갖 향기로운 가루가 빗물에 섞여 내려 개운하게 목욕을 마치도록 도왔다고도 들려줍니다.
 
싯다르타는 목욕만 한 게 아닙니다. 고행하는 동안 한 번도 빨지 않았던 옷을 벗어 깨끗하게 빨아 널었습니다. 역시 그 빨래도 하늘의 신이 도와주었다고 부처님 일대기에서는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개운함을 저주에 가까운 비난으로 맞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근처에서 함께 고행하던 이들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경악했습니다. 쉬지 않고 고행해야 하거늘 난데없는 목욕이라니요. 평소 고행주의자들은 싯다르타의 6년 고행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했습니다. 싯다르타가 조금만 고행을 밀고 나갔다면 고행주의자들을 이끄는 교주가 될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싯다르타는 고행을 멈추었고 목욕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한 여인이 정성스레 만들어온 유미죽까지 받아 마셨습니다. 말끔하게 목욕하고 영양이 넘치는 음식을 먹은 그에게 비난이 날아왔습니다. 같이 고행하던 다섯 명의 동료 수행자들이 “타락한 사람과 함께 할 수는 없다”며 결별을 선언하고 떠나갑니다.
 
싯다르타의 행적에서 보자면 목욕이라는 행위는 과거의 쓸모없는 고행과의 결별이라는, 대담한 몸짓이었습니다.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수행을 위한 수행이요, 결국은 제 몸만 괴롭히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맞고 마는, 무익한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엄숙한 종교적 선언이었지요.
 
새로운 마음으로 한 가지 일에 전념해야 할 때 맑은 물로 몸을 씻어보는 것 어떠신지요. 번거롭다면 손을 깨끗하게 씻는다거나 양치를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깨끗한 몸이 마음까지 상쾌하게 해줄 것이요, 망설이기만 했던 일을 그 기분으로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씻는 일에 골몰하다 보면 어느 사이 씻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심지어는 몸을 씻는 것만으로 마음도 정화되었다고 믿는 이들도 생겨났으니 이에 대한 부처님 생각도 들어봐야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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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