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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면서 얻는 것

밀교신문   
입력 :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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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주말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분주해졌다. 엄마 지인이 날 위해 따로 챙겨 놓은 봄 코트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근처로 온 김에 방향을 틀었고, 민망한 빈손을 고마움으로 채울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백화점에서 새 옷 사주고 싶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건네 주셨지만 문 앞에서 여러 벌의 옷을 한 아름 받게 된 나는 착한 어린이 상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이 났다. 쓰던 옷을 받은 게 아니라 취향을 물려받았다. 그것도 아주 고급 취향을!

 

첫 손녀로 태어난 나는 예쁜 옷을 많이 선물 받았지만, 새 옷보다 물려받은 옷에 손이 자주 간다. 두 살 터울 사촌 언니 때문이다. 얼굴도 더 뽀얗고, 양 갈래로 가지런하게 묶은 새침한 공주 같은 언니가 걸친 게 뭐든 좋아 보였다. 얼른 물려받고 싶은 마음에 언니가 빨리 크길 바랐다. 덕분에 남이 쓰던 물건에 대해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내가 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입어 볼 수 있는 기회이자 내 취향과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도전으로 여겼다.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아나바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생활화 한 건 미국 유학 시절 때다.

 

 내 취향을 고려하기보단 가성비를 따지며 신중히 구매했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대체 방법을 찾아 끝까지 버텼다. 전기 주전자를 사지 않고 냄비에 물 끓여서 사용하는 식으로아껴 썼지만 궁핍한 삶은 아니었다. 짧게는 6개월 정도만 생활하고 돌아가는 어학연수 온 친구들, 졸업하고 귀국하는 유학생 선배들 덕분에 학기가 끝날 때마다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여러 사람이 쓰던 물건을 받으면서 사용감은 있되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깨끗하게 쓴 물건을 누구나 받고 싶어 한다는 걸 배웠다. 귀국한 뒤, 정착할 공간이 생겨 이제서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구와 벽지로 골랐다. 비싼 것보다 내 취향에 맞는 걸 사고, 취향이 바뀌면 고민 없이 당근마켓앱으로 팔았다.

 

당신 근처의 직거래 마켓의 약자로 동네 이웃과 안전하게 거래하는 게 당근마켓의 특징이다. 첫 판매는 겨우 1년 사용한 화장대였다. 80% 할인된 가격으로 내놓으니 불이 나게 연락이 왔다. 막상 없으면 불편해서 다시 살 거라는 엄마의 예측은 빗나간 채로 여전히 내 방엔 화장대가 없다. 대신, 물려받은 장식장을 직접 페인트칠하고 양쪽 유리 문짝을 떼서 화장대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 상태는 좋지만, 색깔이 칙칙한 7칸 자리 CD 꽂이를 버릴까 고민하다가 무료 나눔으로 내놓았는데, 받아 가신 분이 다육이 화분 진열대로 잘 쓰고 있다는 후기를 남겼다.

 

 본래 용도와 달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게 나눔의 매력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나누는 건 책이다. 학창 시절 때부터 아빠는 문제를 풀더라도 문제집에 정답을 표시하지 못하게 하셨다. 같은 문제집을 여러 번 풀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지만, 밑줄도 긋고, 정답 표시도 하면서 문제집을 지저분하게 써야 정복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아빠의 교육법이 야속했다.

 

 하지만 이런 습관 덕에 나는 문제집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책을 소중히 다룬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해도 형광펜을 칠하거나 페이지를 접지 않는다. 대신, 필사하거나 사진으로 남겨둔다. ‘내꺼니까 내 마음대로 해야지가 아니라 좋은 책이니까 다른 사람도 읽을 기회를 줘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가급적이면 구김 없이 읽으려 한다. 깨끗하게 읽은 책들을 월곡동 꿈그린도서관에 한 박스 가득 전달했다. 비우고 정리하고 나면 대중탕에서 이제 막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가볍고 산뜻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소유와 집착을 덜어낸 만큼 채워질 변화에 설렌다. 이처럼 나누는 습관이 좋은 이유는 비우는 만큼 가능성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양유진/네이버 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