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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와 시간 여행

밀교신문   
입력 :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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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트로트를 들으며 추억에 젖어 울고 웃는 것이 휴식과 위안이 되고 있다. 가슴에 밥물 같은 물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걸 보면 나이를 먹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 유년의 고향에는 아버지와 바다, 또래 친구, 그리고 트로트가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사시는 초가의 호롱불이 빨간 백열등으로 바뀔 때쯤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밤마다 아버지는 우리 두 남매를 양팔에 안고 주인을 살린 개 이야기, 떡 할멈과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었고 발바닥이 따뜻해질 때면 꼬꼬닭도 울지 말고 멍멍개도 짖지 마라라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군불을 때지 않은 방이 차가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슬픈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그르렁거렸고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연신 동생과 나의 뺨을 꼭꼭 찔러대었다. 아버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황성옛터를 즐겨 부르셨고 술에 취하신 날에는 무거운 발걸음만큼이나 노랫가락도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황성옛터의 그 애절한 가사가 어린 가슴에도 슬프게 다가와 노래를 듣는 동안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황성옛터는 영화가 아닌 아버지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노래가 들릴 때면 내 가슴도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릴 적 내 고향은 바다와 산이 마주 보며 해녀들의 기-인 숨소리가 노랫가락을 타고 출렁이는 동네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동갑내기였던 친구와 나는 감자와 마늘을 구워 먹던 새까맣게 불탄 밭두렁, 우산 풀, 쇠풀들이 서로를 부벼 대던 잡초 우거진 길, 파도에 밀려온 조개껍질들이 수북이 쌓여있던 바닷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비고 다녔다. 짧은 겨울 해가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을 비추며 여기저기 저녁밥 불 때는 연기가 초가집 지붕 너머로 숨어드는 때까지 우리는 어깨동무에 고개를 흔들면서 트로트 가요를 부르고 또 불렀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가사의 의미도 모른 채 구성진 노랫가락이 흥에 겨워 눈을 감고 발로 땅을 구르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나면 한겨울 살갗이 터지는 바람에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구멍가게에 종종 심부름을 갔었다. 가게 마루에는 늘 알사탕의 달콤함이 베여있었고 조그만 라디오에서는 동백아가씨의 고운 멜로디가 막걸리 향기보다 더욱 달콤하게 피어올랐다. 내가 살았던 마을 회관에서는 대낮부터 구성진 트로트가 흘러나와 하굣길에는 유채꽃과 푸른 햇살로 뒤덮인 바다 한가운데서도 동백아가씨의 노랫가락이 통통배를 따라 울려 퍼졌다. 자고 나면 그 노래를 들었던 유년의 기억에는 도시를 그리워하는 소녀의 감성이 동백아가씨의 이야기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어느 곡 하나 사연이 없는 노래가 없을 만큼 트로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어서 들을수록 고향의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한때 왜색, 뽕짝이라는 이름으로 비하되었던 트로트가 미스, 미스트 트롯 열풍과 함께 새롭게 부상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단지 인기몰이의 유행에만 그치지 않고 트로트에 담긴 민족의 애환과 꿈을 이해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역사가 더욱 찐 할 테니까.

 

박현주 교수/위덕대 간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