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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아득함

밀교신문   
입력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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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촌장은 가시나무새에서,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고 노래한다.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내가 가시가 되어 당신의 진입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한없이 강한 듯 나약하고, 매우 온화한 듯 공격적인 존재다. 문제는 어떤 내가 항상성을 가졌는지, 어떤 내가 변심이 가득한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에 수시로 전이가 일어나지만 나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물론 스스로 완벽하다는 이들은 이 점을 잘 수용하지도 않는다. 이런 전제 속에서 본다면 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람과 사람이 만나 길을 놓고 공장을 짓고 학문을 세우고, 그래서 생산성도 높이고 그렇게 모든 분야의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켜온 것인데, 그런데 생각해본다. 무엇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기고 생채기가 나고 심지어 죽고 죽이기까지 하는가.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회사 동료 사이에서 관계가 어긋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가장 아픈 말로 혐오하고 상처를 준다는 사실은 여러 통계가 증명한다. 왜 멀리 있는 뉴스 속 아픔엔 공감하고 내 옆에 있는 이의 아픈 손은 잡아주지 못하는가. 관계의 아득함이다. 우리는 가끔 관계의 따뜻함에 환호하기보다 관계의 아득함에 절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일이 삶의 충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아름답고, 호흡이 맞는 사람끼리 같이 일을 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와 강변을 함께 걷고 싶고, 어떤 이와 밥을 같이 먹고 싶은지 자문해보자. 세상 누구도 나와 똑같지 않고 인간은 늘 갈등 속에 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은 하심(下心)을 조언한다. 그것이 사람과 인연을 맺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거다. 내가 부족하다며 좀 낮춰야 진심이 담긴 대화가 시작된다. 그래야 유머가 생기고 타인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내가 억압적 가시를 뻗거나 오해의 다리를 펼쳐 놓고 있을 때에는 속수무책이다. 내게 빈틈이 있어야 훈훈한 바람도 들고 상대가 들어설 자리도 생기는 법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길을 만든다. 어둠과 슬픔이 쌓인 인생의 큰 강 앞에 직면해서야 하심의 가치를 느끼고 후회를 할까.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할 때는 최고의 전문성을 발휘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인간관계 속에서는 내가 좀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낮추는 이가 더 지혜로운 사람이다.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나와 다르다고 조건을 달리하고 가지를 자꾸 치면 편협한 세계에서 결코 벗어날 길이 없다. 내가 모든 답을 알고 있고 너보다 똑똑하다고 나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강점의 약점이 되어 관계 맺기를 방해한다. 자아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우리는 늘 자아의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 아닌가. 그것도 내 안에 있는 가시나무숲 같은 자아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상대가 있는데 나만 하심한다고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관점이 있다. 맞다. 관계가 힘들면 외면도 필요하다. 약간의 거리가 상대와 더 좋은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를 낮추고 마음을 열고 화가 낼 땐 화도 내고 또 사과할 땐 사과도 잘 하면서 같이 가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만 알고 있다면 말이다. 비대면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타인과 관계 맺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내가 몸담은 공간의 역동성도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불러보는 서원가 낮은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한상권(심인고 교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