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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리딩과 얼리어답터

밀교신문   
입력 :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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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문장가 구양수는 글쓰기의 비법으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강조했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여러 권의 책을 많이 읽는 것과 한 권의 책을 천천히 깊게 읽는 방법 중에서 후자의 가치에 주목하기도 한다.  

 

소위 슬로리딩이라고 하는데 교육 현장의 한 학기 한 권 읽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속도의 시대일수록 천천히 읽으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 자신의 삶과 이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로리딩의 궁극적 목적은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풀리지 않는 문제 하나를 붙잡고 몇 시간을 골몰하는 친구와 잘 모르는 문제는 넘기고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내려는 친구 중에서 전자의 경우는 단기전보다 장기전에서 더 큰 성과를 낼 수도 있다. 슬로리딩 만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으며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기 위해 다른 책도 겹쳐 읽다 보면 생각의 폭과 넓이가 꽤 확장된다. 폭풍 성장이란 천천히 깊이 있게 발효된 생각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설 때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사회학자 로저스는 그의 저서 혁신의 확산에서 소비의 유형 혹은 혁신수용 형태를 다섯 가지(혁신수용자, 조기수용자, 초기 다수수용자, 후기 다수수용자, 지각 수용자)로 분류했다. 지금은 혁신수용자나 조기수용자 모두를 통칭하여 신제품을 남보다 빨리 구입해 사용해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얼리어답터라고 한다. 그들은 구매비용의 부담을 감수한다. 당연히 기계 혹은 도구에 대한 접근을 다양하게 시도하며 새로움의 가치를 선도하기도 한다. 때로는 제품의 빠른 소비를 유도하는 광고와 판매 전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다섯 유형 가운데 어떤 쪽이 낫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화를 개봉관에서 남들보다 앞서 보든 효용성이 낮을 때 적은 금액으로 집에서 받아 보든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다. 하는 일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고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어떤 집단의 리더라면 얼리어답터의 정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난여름 끝에 발매한 BTS다이너마이트라는 노래가 단숨에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라선 것도 BTS의 음악적 매력과 얼리어답터 같은 능동적인 팬덤 문화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얼리어답터들은 제품의 가치와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중요시 여긴다. 필자처럼 기계치에 가까운 이들은 애플의 신제품 출시일에 맞춰 도쿄나 상하이를 먼저 방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교육의 본류에 집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며 교육 정책의 방향을 가늠하고 미래 가치 창출을 위해 서둘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 미래를 말하는 교육자나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경영자라면 미래에 대한 방향을 수시로 점검하고 앞서 대비하는, 진정성 있는 얼리어답터의 시각도 필요할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로버트 해그스트롬)이라는 책에서는 현명한 투자가가 되려면 책을 읽어라,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철학과 심리학을, 물리학과 수학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세포의 하나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그래도 책읽기 좋다고 하는 가을이다. 내가 어떤 분야의 얼리어답터라고 하더라도 더 가치 있는 선도적인 길을 지향한다면 슬로리딩으로 이 가을을 꾸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 책이 일리아스’(호메로스)라는 두꺼운 고전이든 졸저, ‘그 아이에게 물었다라는 작은 시집이든 말이다.

 

한상권(심인고 교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