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사념처에 대해 알려주세요

밀교신문   
입력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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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방법으로서 전통적인 불교수행에서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고요하고 평등하게 가지기 위해 신(((()의 사념처(四念處)를 닦을 것을 설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를 순차적으로 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념처는 무상함과 괴로움, 실체 없음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지극하게 마음으로 생각해서 보기 때문에 달리 관법(觀法)’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 즉 이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하는 신념처(身念處)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외모가 준수하다 하더라도 이 몸은 피와 고름과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본래 깨끗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썩고 말 것이란 사실을 관하는 수행법이에요. 타일랜드와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에 차야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붓다다사라는 유명한 스님이 계셨어요. 그 스님이 계신 절의 법당 툇마루에는 생물 시간에나 봄 직한 백골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놀라 기겁을 한 관광객들이 가까이 가서 명찰을 봤더니 ‘1930년 미스 타일랜드의 실물이라고 붙어 있더랍니다. 몇십 년 전 타일랜드 최고 미인의 모습을 법당에 드나들며 매일같이 바라보면서 무상과 무아를 실감하기 위해 안치한 것이었지요.

 

둘째, 관수시고(觀受是苦). 즉 내가 몸과 마음으로써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는 느낌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수념처(受念處)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온갖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도 그것을 멀리서 보면 잔잔해 보이듯이, 고통과 안락은 극과 극인 것 같아도 알고 보면 한 몸이에요.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내가 좋게 보는 것에도 단점은 있게 마련이고, 안 좋게 평가하는 것에도 장점은 있는 법이지요.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라, 평등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셋째, 관심무상(觀心無常). 즉 내 마음과 의식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무상하게 변하고 있음을 관하는 것이 심념처(心念處)입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없어요.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다녀온 뒤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아침에 먹은 마음이 점심때까지 가기도 어렵고, 오늘 마음이 내일까지 가기도 어려워요. 이처럼 자주 변덕을 부리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늘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넷째, 관법무아(觀法無我). 즉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일체 만법에는 그 자성(自性)이 없음을 관하는 법념처(法念處)입니다. 평소에 당신 변했어라든가 사람이 왜 그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을 줄곧 하잖습니까? 그런데 원래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11초가 다르게 시시각각 변하잖아요. 이처럼 변하기 쉬운 것이 바로 중생심인 거예요.

 

이렇게 사념처를 통해 나의 몸과 마음을 관하게 되면 그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집착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러한 사념처 등의 관법 수행이 크게 유행했어요. 그러다가 시대가 변하고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수행하는 방법도 조금씩 바뀌어갔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참선수행법이 크게 발달했고, 남방에서는 관선이 성행했으며, 티벳과 몽고 등에서는 만다라나 다라니수행법에 의존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지요.

 

매사에 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 설하신 무아(無我)’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범부는 이 몸을 아()라고 하고 외도(外道)는 일체제법(一切諸法)에 대하여 실아(實我) 실법(實法)으로 잘못 생각한다.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한 것이어서 법의 실체도 없다.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길상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