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4-황해남도 광조사지

밀교신문   
입력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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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수미산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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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광조사지
 
위성지도에 보면, 한반도의 동서 길이는 321㎞(786리)이다. 서쪽으로 제아무리 넓혀보아도 옹진반도가 그 전부다. 1823년의 ‘해동역사’에는 “황해도는 1018년 고려시대에 서해도(西海道)였다. 1395년 풍천과 해주의 이름을 따서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 때에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황해도는 1417년에 황주와 해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해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군의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이름을 해주라 하였다.” 1899년 편찬된 ‘해주지’에 해주는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이었는데, 지성 또는 장지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 때 폭지라고 개칭했으며, 고려 태조가 ‘군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다’고 하여 이름을 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정인지는 ‘향교기’에서 “해주 지역은 살기 좋은 바다 고을”이라고 했듯이, 동해의 원산과 남해의 통영ㆍ여수와 아울러 진남포와 함께 서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다.
 
‘해주지’에서 해주는 “경기도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이로운 보장지이고, 산천이 아름다운 곳으로 칭했다”라며, 해주의 8경과 수양산성·지성산성·해주성 등에 대해 기록했다. 나밋골 또는 수양이란 별칭으로 불린 해주는 조선 세조의 왕자 시절 군호로 유명한 수양대군의 이름도 이곳 지명에서 딴 것이다. 해주 향교를 비롯해 고려시대 최충을 봉향한 문헌서원, 주자와 조광조 등을 배향한 소현서원, 해주성에서 동쪽으로 2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백이ㆍ숙제의 사당인 청성묘는 1701년에 건립하고, 마당에는 1728년 주희의 ‘백세청풍’ 네 글자를 새긴 비를 세웠다. 향현사, 충절사는 사당이며, 사황재는 해주 읍치의 서문 밖에 건립된 서원이다. 이 밖에도 사미정·지환정·탁열정·부용당·석빙고 등 명승고적이 많이 있다.
 
황해도의 도 소재지였던 해주는 1954년 10월 남북도 2개의 도로 갈라지면서 황해남도의 도 소재지가 됐다. 조선 정조 때의 규장각 학사 윤행임은 ‘석재고’에서 삼봉 정도전의 인물평에 차운하여 황해도 사람은 “거친 돌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고 억세다(石田耕牛)”라고 재미있게 묘사했다. 한편, 황해도의 명승 가람에는 강원도와 충청도 출신의 승려들이 같은 고장 출신의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전한다.
 
구산선문의 수미산문, 광조사
우리나라 선의 효시,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 말 고려 초기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불교운동의 9개 거점사찰을 말한다. 안타깝게도 수미산문을 열고 선문화를 펼쳤던 해주 광조사는 지금 폐사지로 석탑과 비석만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1084년 1월 “보제사 승려 정쌍 등이 (왕께) 아뢰기를, ‘9개 산문의 참학 승도를 진사로 선발하는 예에 따라서 3년에 1회 선발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구산선문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광조사 터에 있는 진철대사비의 비문에는 937년 수미산파의 진철이엄파 등에 선종구산(禪宗九山)이 있고, 1142년 10월에 건립된 <천태묘응대선사묘지명>에는 달마구산문(達磨九山門)에 모였다. 1283년 보각국사 일연은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는 등 선종 가지산문에서 고려불교의 교권을 통활하기도 했다. 1660년 팔공산 부인사에서 판각 인쇄된 ‘선문조사예참의문’에는 구산선문의 명칭과 장소, 33명의 조사와 우리나라 10대 국사에 대한 예참문과 선사상, 특징을 잘 묘사한 초상의 삽화까지 싣고 있다.
 
남한의 8개 사찰과 해주에 1곳의 구산선문은 도의·체징의 가지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혜철의 동리산문, 무염의 성주산문, 범일의 사굴산문, 절중ㆍ도윤의 사자산문, 현욱·심희의 봉림산문, 이엄의 수미산문, 도헌·긍양의 희양산문을 말한다. 신라 말기부터 개창된 마조 계열의 여덟 곳의 산문과 달리 수미산문만이 유일하게 석두 계열의 조동종이었다.
 
946m의 수양산(首陽山) 광조사는 932년에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로, 이엄대사가 초대 주지를 맡았다. 1701년(숙종27)에 지은 ‘묘음사사적기’에는 “신라 932년 이엄대사가 광조사를 창건했다”라고 했다. 진철이엄 국사는 ‘고려사’에 920년 10월 서경에서 돌아온 왕건이 이언을 왕사로 삼고, 개성 천마산 대흥사에 모셨던 바로 그분이다. 고려 건국 이전부터 왕건과 직접 연결되었던 대경여엄·선각형미·법경경유 대사와 함께 ‘해동 사무외대사(四無畏大士)’라 부른다. 이분들의 사상 경향은 고려 왕건을 보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들림 없는 경지에 도달한 네 명의 스승’이란 뜻의 사무외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먼저 불린 명칭이 아니라 고려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개성 용암산 극락봉 중턱에 자리한 오룡사 터에 자리하는 944년 건립된 ‘법경대사 보조혜광지탑비명’에 보면 “경유·형미·여엄·이엄은 모두 도응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해동 사무외대사라 일컬어졌다. 운거화상이 대사들을 보고 이르되, “말을 들으면 선비임을 알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은 만리가 곧 동풍이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 운거화상이 자등을 부촉하고, 비밀리 법요를 전해준 다음 드디어 나의 도(道)가 동쪽으로 흘러갔으나, 경유 한 사람이 능히 나의 마음을 발명하였다”라고 기록됐다.
 
고려 수미산의 절, 광조사
구산선문 가운데, 932년 북녘땅에 유일하게 개창된 수미산문은 해주의 수양산 광조사를 일컫는다. 황해남도 해주 읍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수양산 일명 수미산의 남쪽에 자리했다.‘대동여지도’에서는 두 곳의 산을 별개의 산으로 표기했다. 북쪽의 수미산을 진산으로 바로 앞에는 광석천이 흐르고, 비류진 포구가 자리했다. 바로 강 건너편에는 해주의 주산인 용수산이 자리하고, 그 동북쪽 강어귀에는 자복사가 있었다. 그 아래쪽에 해주 읍성의 북문과 칠량정으로 연결되고,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한 읍성과 황해도의 감영이 자리했는데, 지금의 해주시 읍치구역이다.
 
해주시 학현동 즉, 학고개를 넘어서 제령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북쪽 금고라는 곳을 지나서 서쪽 골짜기로 4km를 더 가면 수미창 마을에 이른다. 비석은 바로 이 마을 북쪽에 솟은 수미봉(지금의 창검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이곳에서 50m 동쪽 지점이 광조사 터다. 10세기에 고려 왕건이 건립한 광조사의 전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원래 5층 석탑은 1939년 촬영한 사진에 3층탑으로 산기슭에 기울어진 채로 있다가 1948년 다시 5층탑으로 복구되어 절터를 지키고 있다.
 
1454년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름은 없으나,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광조사는 수미산에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 임진난 때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경에 편찬한 ‘대동지지’에서 “광조사는 옛터”라고 기록했다.
 
3층 석탑과 같이 외로이 절터를 지키고 있는 국보유물 제85호 광조사 진철대사비는 1486년의 ‘동국여지승람’과 1668년 간행된 ‘대동금석서’ 등에도 수미산에 있다고 쓰여 있다. 높이 3.7m에 폭 1.151m에 달하는 비석은 기단석과 거북받침, 비신과 비머리로 이루어졌다. 기단석과 거북받침은 1개의 화강석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기단석은 길이 2.39m, 넓이는 2.31m이다. 큰 탑신을 가진 거북이가 기단석 위에 네 발을 힘있게 딛고 목을 곧추 쳐들어 비신과 비머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은 힘 있고 굳세어 보인다.
 
이 비석은 충남 서산군 태안면 출신의 이엄대사가 936년에 입적하고, 937년 12월 20일에 건립한 것으로 최언위가 비문을 지었고, 이환상이 글을 썼으며, 윤상신이 새긴 것이다. 비문의 탑본에는 35행에 1행 77자로 새겨진 비문과 ‘해주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문’이라고 각명되었다. 또 속성은 김씨, 그의 선조는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신라말에 난리가 많이 일어나 그의 할아버지가 웅천(공주)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엄은 소태(蘇泰)에서 870년에 태어났으며, 나면서 신상이 특이해 세상 사람과는 달랐다. 12살에 출가할 뜻을 세우고, 즉시 가야갑사의 덕량법사에게 나아가 출가했다. 비석의 게송에는 “해주의 수미산에 총림을 열었으니, 조계종의 정통법맥 이어 받았네”라고 산문의 위상을 새겨 놓았다. 이엄대사의 묘탑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사라져서인지 1940년대까지 조사한 내용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1900년 이전에 사라진 광조사지에는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만이 있었다. 1900년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에도 “옛터에 오층석탑과 비석,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다”라고 했다.
 
광조사는 이미 사라졌지만, 해주에는 1899년에 편찬된 ‘해주지’ <사찰>편에 원나라 황제의 원찰로 건립된 신광사를 비롯해 은적사·정각사·빈발사·은동사·은신암 등 20여 곳이 넘는 사찰이 있었으나, 1950년 12월 전쟁 때에 모두 소실됐다.
 
해주 비빔밥과 수양미나리
황해도 해주의 유명한 음식은 해주교반과 미나리, 실미역, 쌀새우(백하), 자하로 만든 곤쟁이젓, 참서대, 짱뚱어, 즉어(붕어)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북숭미나리와 고사리, 송이, 옹진김 등을 듬뿍 넣은 해주 비빔밥은 명품요리에 이름이 올랐다. 전주비빔밥 등으로 불린 비빔밥은 김일성 주석이 1957년에 “구태여 다른 고장의 이름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라는 교시에 따라 해주교반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라고 한다. ‘비벼서 먹는 밥’이라는 뜻의 교반은 1925년 최영년의 ‘해동죽지’에 해주의 명물 음식으로 해주교반이 나온다. 그 당시에는 밥을 미리 기름에 볶아 먹는 풍습이 별로 없어서 기이한 별식으로 소개했다. 묵은지로 만든 해주 짠지밥과도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 서북쪽에 백이·숙제 사당이 있다”라고 한 것처럼 중국 수양산에 비유한 해주의 수양산 고사리와 미나리는 식물보호구로 지정된 수양산성 늪에만 자생하는 수양미나리다. 세계적으로 1과 1속이며, 이곳과 중국 산동지방의 북숭산 바위 늪에서만 자란다고 하여 북숭미나리로 달리 부른다. 황해도의 3대 산성으로 고구려 장수왕 때 축성된 보존유적 제241호 수양산성은 성벽 둘레만 8km에 이르고, 그 아래에 높이 128m의 2단 수양폭포는 ‘지성폭포’라고도 부른다.
 
수양산성 내의 늪지인 작은 연못에 자생하는 북숭미나리와 수양고사리 등으로 만든 ‘해주교반’을 한번 먹으러 황해도의 보물, 해주를 꼭 찾아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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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금산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2 앞면 1929년촬영 목록집1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사진 해설
: 수양산 광조사지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 (사진 :유리원판목록집1, 192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