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62-집을 짓다

밀교신문   
입력 :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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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집이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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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이 지나 서늘한 바람이 한 자락 불어오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이 떠오릅니다. “주여!”라며, 저들이 세상만물을 창조했다 여기는 창조주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때가 왔습니다.”라고 운을 뗍니다. 달콤한 열매를 맺어가는 여름은 위대했지만 그래도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뜨거운 볕을 조금만 더 내려달라고 청하면서도 시인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고,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오래 고독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서둘러 집을 지어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을 텐데 왜 시인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하는 걸까요? 가을을 찬미하는, 종교성 짙은 시에 ‘집’이 등장하는 것이 참 특이합니다. 아마 릴케는 집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세속적인 목표라는 뜻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세속의 온갖 수고로운 노동을 멈추는 계절이요, 겸손하게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야 할 계절임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건축가 김기석은 집이란 사랑이고 문학이고 추억이고 동경이고 바다며 상징이고 성(性)이며 리듬이라고 정의합니다. 집이란 것이 딱딱한 재료를 쌓아올리고 칸을 지르고 벽을 세우고 천장을 덮는 지극히 물질적인 구조물일 뿐인데, 건축가는 집을 가리켜 사람에게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고 만물을 품는 우주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집을 떠올리지 않고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집을 지었을까요? <디가 니까야>의 「세상의 기원에 대한 경(世紀經)」에는 집의 기원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인간이 호기심과 탐욕으로 지상의 먹을거리에 맛들이면서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시작됩니다. 먹을거리로 인해 인간의 몸이 딱딱해지고 거칠어지다가 차츰 남녀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지요. 그러면서 곧 다른 성(性)을 향해 욕망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성행위를 하게 되는데, 인류 최초기에는 그런 행위가 너무나 낯설어서 끔찍하다고까지 여기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을 피해서 남녀가 집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이란 바로 성(性)이라고 하는 앞서 건축가의 정의가 딱 들어맞습니다. 집을 짓는 이유가 추위와 더위 그리고 맹수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간의 성욕을 다른 이에게 감추고 보호받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경전의 입장인 것이지요.
 
마음에 들고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가까이 두고 싶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은 멀리 하고 싶은 게 본능입니다. 그런 면에서 집이란 자기의 행복을 가장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장치입니다. 집을 지은 뒤에는 자기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집을 채우고, 마음에 들지 않고 쓰임을 다한 것은 집밖으로 내버립니다. 집은 이렇게 중생의 중생다움을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그 어떤 것입니다.
 
사람은 집을 튼튼하게 마련한 자기 능력을 자랑합니다. 그 튼튼한 집에 머물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 인물인 다니야도 그랬습니다.
 
경전의 해설(전재성 역 <숫타니파타> 401쪽)에 따르면, 다니야는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황소가 3만 마리 있었고, 2만7천 마리의 소에게서 젖을 짰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소를 관리하려면 땅도 넓어야 하고 식솔들도 많겠지요. 우기와 건기를 잘 살펴서 수많은 소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신선한 풀과 물을 제공하고 해가 지면 튼튼하게 지은 축사에는 소떼를 몰아넣었고 하인들에게도 아늑한 보금자리를 제공했습니다. 부지런히 소젖을 짰고 가족과 하인들이 먹을 밥도 푸짐하게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다니야의 모습은 세속에서 성공한 사람, 그리고 성공을 유지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어느 날 다니야가 말했습니다.
 
“나는 밥도 다 지어놓았고 우유도 다 짜놓았습니다. 강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내 집은 지붕이 덮여 있고 신을 위한 불도 환히 밝혀 놓았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뿌리십시오.”
 
얼마나 세속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얼핏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니야의 이 말을 받아서 부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뜻밖입니다.
 
“마음에 화를 품지 않아 삭막함은 사라졌습니다. 강가에서 하룻밤을 지내지만 내 집은 열려 있고 불도 꺼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뿌리십시오.”
 
해가 지면 집 안팎을 단속하고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가야 하는데 부처님은 뜻밖에도 집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행복을 빌려고 신 앞에 밝힌 불 같은 것은 꺼져 있다고 말합니다. 불안하지 않을까요? 천만예요. 비가 내리든 눈이 내리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후 다니야와 부처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 광경은 마치 힙합배틀이나 댄스배틀과도 같습니다. 다니야는 완전무결하게 가정을 잘 꾸리고 있으니 불안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튼튼하게 지어놓은 집안을 아내와 자식들이 넉넉하게 채우고 있고, 축사에는 가축들이 꽉 차 있고, 말뚝도 튼튼하게 박혀 있고, 사람이 먹을 식량과 가축이 먹을 꼴도 넉넉하며 황소와 암소가 건강해서 새끼를 계속 낳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부양해야 할 가족도 끝없이 보살피고 먹여야 할 가축 무리도 없으니 근심걱정할 일이 없다고 응수합니다. 마음이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고 눈치를 보며 노동을 제공해서 품삯을 받아야 할 일도 없으니 불안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생각은 세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속의 범부란 가족을 부양하고 그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지니기 시작하면 계속 더 가져야 하고 일단 지니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다 목숨이 다하면 스르르 움켜쥔 주먹에 힘이 빠져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졌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세속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하시고 그런 삶에서 진정한 기쁨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지니려고 애쓰고 유지하려고 움켜쥐고 있으니 힘들고 괴롭고 불안한데 사람들은 그걸 삶의 보람이라 여기며 그래도 행복하다고 자기위안을 삼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꾸 가지고 쌓고 모아두던 집이란 공간에서 사람은 행복하다고, 아늑하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 집 때문에 죽을 때까지 쉬지 못했음을 알아차린다면….
 
다니야는 결국 부처님의 견해에 동조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있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고 더 이상 가지지 않으며 아쉬움을 품지 않아서 자유로운 것이지요.
 
부처님도 그렇게 세세생생을 지내왔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윤회하면서 단 한 생도 집을 마련하느라 애쓰지 않은 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랍니다. 대체 왜 그리 집을 짓지 못해 안달이었고, 집을 다 지은 뒤에는 어떠했는가를 부처님은 살폈습니다. 언제고 부서지고 말 집을 짓느라 생을 다 허비하면서도 정작 그 집을 짓는 사람 자신도 부서집니다. 덧없기 짝이 없는 존재가 덧없기 짝이 없는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영원히 살지도 못한 채 목숨이 끝나 집을 떠나고, 집조차도 세월 앞에 낡고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한없이 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그토록 집을 지어댔던 이를 찾아보았는데/정작 그 집을 지은 이를 찾지 못한 채/여러 생을 보냈으니 힘들기 짝이 없구나.”
 
우리, 또다시 집을 지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다고 부처님은 말합니다. 이 얼마나 덧없는 과정인지를 통렬하게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서 노래합니다.
 
“아, 집을 짓고 있는 사람이여!/이제야 나는 너를 보았노라./너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쪼개졌다./마음이 피안에 이르렀고/온갖 욕망이 스러져버렸구나.”(법구경)
 
이 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의 노래)이라 불립니다. 깨달은 사람을 가리켜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 사람이라 말하고 그래서 더 이상 슬프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상에서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은 승리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부처님 눈에는 불안과 슬픔의 움막일 뿐입니다. 단 한 채도 덧없는데 그 덧없는 걸 그리도 많이 지니고 있으니 그 인생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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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