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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에 길을 묻다

밀교신문   
입력 : 2020-12-29  | 수정 :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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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밝았다. 새로운 희망을 말하기엔 코로나19의 시간이 아직도 엄혹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돌아가는 것이 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답답함을 잠시나마 덜어 보려고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마침 추사 김정희의 특별전 소식과 함께 굴곡 많은 세한도(歲寒圖)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위세는 세한도를 향한 시민의 발길도 멈추게 만들었다

 

세한도는 허름한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네 그루가 전부이다. 추운 시절의 그림에 걸맞게 단순한 구도에 보는 것만으로도 쓸쓸함과 한기가 느껴진다. 원근법도 버리고 여백 가득히 대체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그저 추사의 마음을 헤아려볼 뿐이다.
 

 

사실 추사는 참 극적인 생애를 보낸 인물이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 집안 출신인데다 그의 학문세계는 청나라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빼어났다. 청과의 인연은 그가 24세 때 자제군관 신분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이후부터인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겐 청의 지식인을 만나 교류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실학자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던 추사도 연경의 지식인을 만나 깊은 지적 교류를 한다.

 

그러나 정작 55세가 되던 해, 이번엔 자제군관이 아닌 직접 사행단 대표인 동지사부사로 내정돼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연경이 아닌 제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것도 유배령 중에서 가장 가혹한 가시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위리안치에 처해진다.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유배라는 절대고독 속에서도 추사는 조선 최고의 문인화인 세한도를 완성한다.

 

그가 평생을 통해 닦은 경학이나 금석학도 빛나고 초의선사와의 우의도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도 감탄할만하지만, 아무래도 추사를 추사이게 하는 것은 단연 세한도라 할 만하다. 유배 중 아내가 병으로 죽고, 섬 바깥 사정은 물론 청나라 용방강과 완원 같은 이와 맺은 학문적 인연도 모두 끊어졌던 시절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던 통역관 이상적이라는 제자가 책을 좋아하는 스승을 위해 청에 갈 때마다 귀한 신간서적들을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다. 그게 어디 쉬웠을까. 어쩌면 목숨을 거는 일이다. 또한 추사의 삶과 학문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추사는 세한도에 담아 보낸 것이다.

세한도 왼쪽 화발에서 추사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상적의 살가운 의리에 대해 고마워했다. 또한 오른쪽 하단에 장무상망(張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이라는 말까지 진심으로 새겼다. 그래서일까. 가로 길이가 1m 밖에 되지 않던 세한도는 이후 청과 일본, 다시 우리나라로 유랑할 때 그를 흠모하던 수많은 지식인의 예찬시가 붙으면서 14m로 늘어난다.

 

얼핏 세한도를 보고 있으면 코로나19의 한기가 그대로 겹쳐진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지만 코로나19라는 극한의 바람 앞에서 많은 생명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귀 기울이면 세한도에는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극한의 외로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묻어 있다.

 

그래서 새해, 세한도를 통해 다시 희망을 쏘아 본다. 마른 붓에 진한 먹을 묻혀 거칠게 그려나간 추사처럼 오히려 극한의 여정이기에 움츠렸던 손을 내밀어 더 단단한 한 해를 열었으면 좋겠다. 장무상망의 인간애가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겨울 지나 봄이 오듯 우리 안에서도 곧 품이 따뜻한 길이 새로 열릴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한상권/심인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