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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발

밀교신문   
입력 :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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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엄마는 보행기에 의지해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바닥이 미끄럽다고 양말도 마다하고 실내화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조심조심 걷고 있다. 뒤뚱 거리는 모습이 불안하여 설거지를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엄마에게 향하였다. 마주 바라보던 얼굴을 이제는 내려다봐야 될 정도로 키가 작아지고 허리까지 굽어진 엄마의 뒷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네발로 걷다가 두발로 걷고 다시 세발로 걷는 것이 인생(人生)이란 것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깨닫는 것이 또한 인생(人生)인가보다. 어릴 적 친구들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면서 재미로 주고받았던 말들이 이제는 가슴에서 녹아내려 한 줄기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엄마는 십분도 채 걷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무거운 허리를 펴고 있었다. 지난 해 낙상으로 골절상을 입은 후로 엄마의 세상은 실내로 축소되었고 발이 감당해야 될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엄마의 발에 실내화를 신겨드리자 발목과 발의 차가움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차를 타기 위해 끓여두었던 물을 대야에 붓고 엄마의 발을 담궜다. 발등의 살과 발바닥의 근육이 다 빠지고 앙상해진 엄마의 발이 놀란 듯 수줍은 듯 살며시 물속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물을 천천히 엄마의 발등에 끼얹어 주면서 엄마의 발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일상의 바쁨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엄마의 발을, 그리고 엄마의 인생을.

 

()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인 정의로 발은 우리 몸의 가장 아래에 있으며 서 있거나 이동할 때 바닥을 지지해주는 부분이다. 이렇게 신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삶의 원동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발이건만 발은 우리 신체에서 관심과 사랑을 덜 받는 기관이다. 문득 그동안 엄마는 우리의 발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엄마는 십리 길도 멀다 않고 걸어 다녔다. 엄마가 걸어서 장에 다녀 온 날에는 라면, 국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들이 보였고 동생과 나는 뜨끈뜨끈한 라면을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엄마가 십리 길을 걸어 차비를 아껴서 라면을 사온 사실은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흙먼지 이는 그 길을 홀로 타박타박 걸어오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동짓달 엄동설한의 한파 때에도 엄마는 연탄불에 항상 뜨끈한 물을 데워서 자식들 세숫물로 떠주고 정작 당신의 발은 갑골문자처럼 수십 년간 그렇게 유구한 세월을 견뎌왔다.

 

찬 공기에 얼룩덜룩해진 엄마의 발등을 쓰다듬고 발바닥을 문지르면서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호사를 모르는 발가락은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오라면 오는 순종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처음부터 태어났던 모양이다.”

 

팔십이 넘도록 딸의 밥을 지어주고 겨울 밤 간식을 챙겨주고 빨래를 해주며 맨 아래에서 묵묵히 나를 지탱해오던 엄마의 발, 그런 엄마의 발이 있었기에 내가 꿈을 꿀 수 있었고 많은 곳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으며 이 공간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엄마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뒤 늦게 찾아온 깨달음과 후회로 가슴이 북받쳐왔다. 얇은 발바닥과 조그만 발가락들을 하나하나 문지르자 하얀 각질들이 조금씩 벗겨져 물위에 동동 떠다녔다. 평생을 힘들게 버텨온 엄마의 삶의 무게가 각질처럼 부드럽게 벗겨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엄마의 조그만 손이 나의 머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박현주 교수/위덕대학교 간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