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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밀교신문   
입력 :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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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학과 축제의 한 코너에서 캉캉춤을 춘 적이 있다. 유려하게 잘 표현된 방식은 아니었다. 서툴고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선배의 손에 이끌려 몇 가지 동작을 익힌 뒤 청춘의 패기로 한 장면을 장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필자는 막상 막춤을 추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순간을 잘 표현하지 못해 당황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래서 어디 한 번 춤을 배워볼까 하고 뜬금없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젊은 뇌과학자 장동선은 <대한외국인>이라는 퀴즈프로그램에 나와 건강한 뇌를 유지하려면 소통을 잘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되 이 모두를 잘하려면 춤을 추라고 강조했다. 그래 그런 거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온갖 기억들이 밀려든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을 갔을 때 석양이 머무는 베키오다리 위에서 탱고를 추던 연인을 보며 뜨겁게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젊은 단테와 베아뜨리체가 격정적으로 춤을 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는 책에는 달밤의 체조라는 그림이 나온다. 어두운 밤에 한 무희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웃옷을 벗어던지고 순박하게 춤을 추는 장면을 오래 감상한 적이 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결말에서 자유인 조르바가 자기 울림대로 바닷가에서 춤을 주는 장면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데보라가 춤추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래서일까. 철학자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제대로 된 모든 고등 교육에는 춤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한 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춤추지 않고 지나간 하루는 그 하루를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웃음이 동반되지 않은 진리는 진짜 진리라고 할 수 없다는 말도 익숙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면과 문장을 대할 때마다 내 안에서 도파민이 꿈틀대듯 즐겁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어느 해 봄에 발의 건축이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발을 보니 모든 꽃들이 다 들어와 있다며 꿈틀거리는 봄날의 대지를 춤추는 이의 춤동작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필자의 머리와 몸속에는 왜 이리 춤에 대한 기억과 스토리가 많을까. 정작 춤 동작 하나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면서 춤을 잘 추는 이를 보면 왜 이리 감정이입이 잘 될까.

 

니체는 앞의 책에서 발을 가지고 춤을 추는 것과 아이디어를 갖고 춤을 추는 것, 단어를 가지고 춤을 추는 것, 펜을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을 차며 살아가거나 빵을 구우면서 살아가거나 어디서 어떤 모양과 숨결을 가지든 나의 삶도 춤을 추듯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살아가면서 다른 이의 생각과 행동과 철학을 반주라고 여기고 나의 삶을 춤추는 것처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다면 생산성도 행복감도 커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라는 책에는 특이하게도 뉴욕의 상위 1% 여성이 몸매를 만들기 위한 고강도 피트니스 훈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장면이 있다. 그 정도의 가혹한 훈련을 통해 얻는 결과물이 아니라도 어떨까. 해질 무렵 불국사에서 쇠북과 범종 치는 장면을 만날 때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살짝 흔들어보는 것, 그렇게 내 앞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간다면 좋겠다. 그렇지, 삶이 곧 고해라고 하나 사랑도 교육도 춤추듯 역동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시인의 언어처럼 읊조려본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한상권(심인고 교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