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행복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밀교신문   
입력 :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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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한 마리가 호숫가로 놀러 왔어요. 우연히 물에 비친 자신의 뿔을 보고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자신의 비쩍 마른 다리를 보고는 실망을 했어요. 그렇게 사슴이 실망하고 있을 때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슴은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조금 전까지 실망을 주었던 비쩍 마른 다리가 사슴을 사자에게서 멀리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던 거지요.

 

사자는 사슴을 놓치고는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사슴은 멀리서 사자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안심하고 시원한 나무 밑에 서서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자가 사슴을 보고는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어요. 사슴은 놀라서 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몸이 빠져나오질 않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탄할 만큼 아름답다고 느꼈던 뿔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던 겁니다.

 

우리는 종종 공덕천은 반기고 흑암천은 밀어내려 하지만,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덕천이 가는 곳에는 흑암천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에서 1등을 하려면 꼴찌가 도와줘야 하듯이, 행복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불행이 있어서 존재할 수 있는 거잖아요? 기쁠 때 흘리는 눈물과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이 각각 별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모두 한 눈물샘에서 나오는, 그 원천은 같은 눈물인 거지요.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마음을 늘 평온하게 가지는 평정심을 잃기 때문에 고락을 분별하고 애착하는 습업을 타고나게 되는 것이지, 불행이란 것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녜요. 어리석은 중생들은 흔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일쑤지만,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좋은 게 영원히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에요. 또 싫다고 투덜거린 일이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일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 들어 복불복(福不福)’이란 표현을 잘 쓰는 것 같더군요. 이 말은 어떤 일이 복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운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어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운수라는 말보다 인연이란 말을 많이 쓰거든요. 운수라고 하면 그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모두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가 지어놓은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군대에서 고약한 상관을 만나는 것도, 회사에서 악질 상사를 만나는 것도, 또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랫집에 소음에 민감한 누군가가 이사를 오는 것도, 단지 복불복의 우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인연이 되도록 오래전부터 자초한 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긴다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마음이 됩니다.

 

흑암천과 공덕천이 한 몸이듯이, 인생의 행과 불행은 어쩌면 서로 다른 모습의 한 몸인지도 몰라요. 멀리서 보면 잔잔한 바다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실제로 보면 온갖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고통과 평화는 극과 극인 것 같아도, 알고 보면 크게 다르다 할 만한 것이 없어요. 호불호에 집착하여 분별심에 끄달리는 일이 없도록 늘 수행하는 자세로 평등하게 마음을 이어나가야겠습니다.

 

고통과 행복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요?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 지어서 과() 받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가시밭이라도 종자를 뿌려 놓고 밭을 매면 한 번도 안 맨 것보다 과가 더 있게 되고 두 번 매면 그만큼 과가 더 있다. 내가 인 지은 만큼 과 받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고락(苦樂)이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내 인과를 알게 되면 고가 적고 모르게 되면 고통이 많다.” (실행론 3-12-2)

 

길상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