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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이지 못한 된장찌개

밀교신문   
입력 :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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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여자가 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빨간 모자와 빨간 니트를 속에 입고 계절감 있는 재킷을 어깨에 가볍게 걸쳤다. 패션 감각뿐 아니라 색 감각이 뛰어난 게 느껴진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는 알고 보니 한국에서 손꼽히는 동양화 교수이자 협회 이사다. 최근에 사무실을 이전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데 열중이다. 몸에 살이 붙을 틈도 없이 꼬박 그림을 그리느라 밥 먹을 때를 놓치기 일쑤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등장부터 요란하다. 양손에는 동네에서 유명한 빵집의 갓 구운 빵과 깨끗하게 씻어 온 포도, 꼭지를 딴 탐스러운 딸기는 바로 집어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왔다. 도착하자 마자 능수능란하게 테이블을 세팅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식사 준비를 돕는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커리어를 지금까지 유지한 여자와 남은 이력이라고는 가족들에게 수없이 밥해준 것 밖에 없는 여자는 뜻밖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바로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

 

여기 두 엄마가 있다.

어느덧 자녀들은 성인이 되었고 엄마의 역할에 대해 같고도 다른 고민을 나눈다. 손가락 피부가 얇아진 엄마가 먼저 입을 연다. 막상 아이들이 어릴 땐 온 신경을 쓰며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성인이 돼서 자기 길을 가니 더는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게 시원섭섭하면서 때론 상실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경제력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엄마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늘 집에서 소비만 하는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커리어를 가진 엄마는 시큰해진 눈으로 입을 뗀다. 아들이 곧 결혼하는데 마침 밥 잘 챙겨주는 처가 식구를 만나 마음이 놓였다고. 아들이 예비처가에 다녀올 때마다 오늘은 뭘 먹었는지 얘기하는데 정작 내 아들에게 한 번도 따뜻한 밥을 해준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가장 먹고 싶은 게 된장찌개였는데, 두부만 사두고 아직도 불을 켜지 못했다. 커리어를 얘기할 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꾹 참았던 무거운 눈물이 그칠 새 없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 속엔 엄마가 있다. 그리고 엄마의 밥에는 힘이 있다. 가족들을 한 자리로 끌어 모으는 힘. 일과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게끔 만드는 힘. 가정을 단합시키는 구호가 한 끼 밥상에 응집되어 있다.

 

여기 두 모녀가 있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같은 성별을 가진 딸은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투영하며 자신의 미래를 본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남편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여자 이길 원하고, 예비 엄마로서, 자식에게 무한히 희생하는 대신 자신의 자아를 단단하게 지켜 나가길 원한다. 내가 태어남으로써 엄마의 인생이 틀어지지 않길 바란다. 자식과 남편의 무대 뒤에서 조연으로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은 딸에게 모성애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한다. ‘나는 저런 엄마가 될 수 없어’, ‘나의 흔적을 지우고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오늘 엄마가 가지 못한 길을 간 다른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지금까지 얻어먹은 엄마 밥이 떠올랐다. 셀 수 없이 많다. 식사 준비를 위해 장 보는 시간, 식사를 마치고 치우는 시간은 청구할 영수증도 없다. 조연이라 생각했던 엄마의 무대에 가장 많이 찾아간 관객이 나였다. 돌아오는 길, 엄마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조명을 비추었다.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 끝없이 반짝인다. 적어도 엄마는 된장찌개를 끓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물 흘릴 일은 없을 테니까.

 

양유진/네이버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