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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밀교신문   
입력 : 20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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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나는 살면서 크게 죄 지은 적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에는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마음 쓰고 움직임이 죄 아님이 없다고도 하고, 우리들이 무시 광대 겁으로 부터 몸과 입과 뜻으로 지어 모은 허물이 수미산과 같다고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우리가 보통 죄라고 하는 것은 꼭 남들이 다 알게 되고 사회적으로 처벌받는 것만을 생각하니 그렇겠죠. 그러나 불교에선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것을 업이라고 하며 모든 업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지은 모든 말 행동 생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 한 일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때로는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만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원치 않는 결과가 나타나면 억울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거미줄에 걸려 있는 잠자리를 보고 잠자리가 불쌍해서 잠자리를 거미줄에서 떼어내서 살려 줬다고 하면 이것은 온전히 선한 일일까요? 잠자리의 입장에선 생명의 은인이겠지만 거미의 입장은 어떨까요? 열심히 집을 짓고 먹이를 기다리다 겨우 먹이가 걸렸는데 누군가 거미줄도 망가뜨리고 먹이도 놓아 줘 버렸는데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통 잠자리를 살려 줬다,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만 하겠죠.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전생의 잠자리를 만난다면 무조건 좋은 관계가 되겠죠.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다음 생에 전생에 거미였던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난다면 나를 어떻게 대할까요? 그러니 생전 처음 만났는데도 나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고 싫어하는 이도 있겠죠.

 

이럴 때 우리는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내가 어느 땐가 지어 놓은 악업의 인연으로 만났구나.’하고 억지로라도 마음을 돌이키다 보면 악의 인연이 다하면 새로운 인연을 지을 수 있게 되겠죠. 그런데 그 순간에 또 원망하고 화를 내면 다음에 또 만나 갈등해야 하는 인연을 짓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하는 인연을 만나면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언제 이런 인연을 지었을까? 어리석은 마음으로 지은 허물 참회합니다'하고.

 

오비이락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우연한 일이 겹쳐 일어나서 억울하게 누명을 쓸 때 주로 인용하는 사자성어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성어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인 홍만종이 엮은 순오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까마귀가 나무 위에 앉았다가 날아가는데 배가 떨어져 마침 나무 밑에 있던 뱀이 머리가 깨져 엉겁결에 죽으면서 까마귀에게 원한을 품게 되고, 다음 생에 멧돼지가 되어 먹이를 찾느라 뒤적거린 돌이 굴러 알을 품고 있던 꿩이 치어 죽게 되는데 이 꿩이 전생에 뱀을 죽게 한 까마귀였죠. 그것을 알 리 없는 꿩은 또 원한을 품고 죽어서 사냥꾼이 되어 멧돼지를 잡으러 가다가 중국 양무제 때 법력 높은 스님인 지자대사를 만나 전생부터 이어져 온 인과 이야기를 듣고 활을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시작된 악연이 계속 반복되어 갈수록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어 다음에는 또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데 법력 높은 스님을 만나 악연의 고리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것은 내가 지어 내가 받고, 좋은 인을 지으면 좋은 과를 받고 나쁜 인을 지으면 나쁜 과를 받게 된다.’는 인과를 믿지 않으면 끊임 없는 악연의 고리를 끊지 못합니다. 나와 연결 되어 있는 인연들에 대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를 생각해 보면 항상 좋은 인연을 지으려고 애쓰게 되지 않을까요?

 

석인 정사/덕화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