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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사회에 대한 소고

밀교신문   
입력 :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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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장덕희 교수.jpg

 

아무런 걱정도 없는 상태에서 좋은 날씨라면 누구와 함께 야외에 나가고 싶으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친구와 함께라는 대답이 한결같더란다. 박사과정의 대학원생과 진지하게 세대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이들의 반응이 놀랍지 않았음에도 가슴 한구석은 허전했다. 전공이 사회복지이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느냐고 고견을 요청하곤 한다.

 

고견이라고? 고견은 사회 지도자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리라. 기업가는 그들대로, 정치가는 또 그들 나름대로 매력적인 고견이 목마를 것이다.

 

압축 성장, 초고령사회 진입, 청년 실업, 저출산, 인구 절벽, 보편적 복지…….

 

예전 같으면 어느 학술대회의 키워드 지위를 얻었음 직한 말들이 사람들 입에 너무도 쉽게 오르내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휘둘러대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닐진대,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니캉내캉이라 합니다라는 농담에 고개를 주억거릴밖에. 전문 용어와 일상어가 자리가 뒤바뀌고 있는 만큼이나 전공자가 고견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에릭슨이 인간발달의 8단계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91세에 사망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래 살았다는 것, 즉 노년의 삶을 향유한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는 오래 살았다는 그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그대가 어쩌다가 노인일 때는 모두 마음의 여유가 있었지만, 마주쳤다 하면 노인인 사회에서는 표정들이 어두워진다.

 

지금까지 인류는 장수 사회를 꿈꾸어 왔다. 그런데 인류 최초로 맞이하는 장수 사회를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큼 유쾌하고 상쾌한 사회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어떤 정책이 참으로 탁견이라 무릎을 치면 그 정책으로 인해 좌절을 겪어야 하는 편이 생기기 마련이라 제로섬 게임이 될 때가 허다하다. 고견은 고견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바로 우견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래도 학자는 고견을 내놓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대학원생과의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어쩌다 마주치는 그대가 노인일 때와 어쩌다 마주치는 그대가 우리 할머니이면, 이웃집 할아버지이면 태도 자체가 달라지는 점에 주목해 보자는 거다.

 

부모와 한두 명의 자녀, 그리고 조부모라는 익숙한 형태의 가족구조에 매달릴 만큼 현대사회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핵가족이니 직계가족이니 하는 용어를 사회적 가족이나 공동체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어느 결혼식장에서 누군가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없던 딸이 생겼다고 하자 그 말을 듣던 친구가 정색을 했다.

 

며느리는 며느리지, 딸은 무슨 딸.”

 

이 말이 그 자리의 화두가 되어 격렬한 토론장으로 변해버렸다.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똑 부러지는 소리가 오죽 많았으랴. 그야말로 고견이 난무했다.

 

지금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지극히 고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끼리가 편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우리 반 반창회에 남의 반 출신이 섞이는 일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고령사회에서 나의 고견은 노인은 노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그 자리에 두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테두리를 비 피하는 우리집 지붕 아래에서 하늘 아래로 넓혀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시인처럼 먼 산을 우리집 정원으로 생각하는 배포로


장덕회 교수/위덕대 사회복지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