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10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7-05  | 수정 : 200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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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밀교종파의 성립 1. 밀종의 성립배경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기를 거치는 동안 밀교승으로 전해지고 있는 인물들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밀본과 같이 독경의식을 통하여 구병법을 행한 부류, 두 번째로 명랑과 같이 신인비법을 통해서 국난극복에 진력한 부류, 세 번째로 혜통과 같이 주력을 통하여 구병법을 행한 부류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현초, 의림, 불가사의와 같이 대일경계 밀교를 전승한 부류, 다섯 번째로 혜초와 같이 금강정경계 밀교를 전승한 부류이다. 이들 중에서 고려시대까지 그 맥이 이어져서 종파로까지 발전한 것은 혜통과 명랑계통의 밀교이고, 이 두 인물을 개조로하여 성립된 종파로 총지종과 신인종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다양한 부류의 밀교승들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현존하고 있는 자료상으로 보면 그들의 활동영역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즉 그들의 활동은 왕실과 귀족사회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특히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밀교승들은 자신들의 역량으로 왕실과 귀족사회의 질병과 재앙을 퇴치했으며, 국가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는 국가수호차원의 호국불사를 봉행하여 왕권과 국토를 보전하도록 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것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에도 명랑계통의 밀교승들인 광학과 대연을 대동하여 국가창업에 동참하도록 한데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해상무역을 주로 하고, 송악의 호족출신이었던 고려 태조가 해적을 물리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명랑계통의 인물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송악에 현성사를 건립하게 하고, 훗날 신인종의 종찰로 삼도록 하였다. 여기서 고려 초까지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나라 밀교종파의 특색은 일본의 밀교종파와 같이 법맥을 중시하며, 그 맥을 잇는데 초점을 맞춘 형태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민중과 국가의 요청에 적절히 부응한 형태의 밀교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진언종의 경우, 법맥의 상승을 중요시한 나머지 법맥은 곧 혈맥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자신들의 신변과 종파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발생하면 국가권력과도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 초기의 총지종과 신인종을 보면 종파성립 당시부터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수많은 도량이 개설되었을 때, 그 성격을 보아도 국태민안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종파는 밀교가 전파된 어느 지역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이며, 우리 나라에서 발생하여 토착화된 밀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티베트에서도 나타났다. 즉 닝마파의 개조로 받들어 지고 있는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 국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오게 되는데, 당시 티베트는 전국각지에 만연한 역병과 홍수로 국가적인 혼란기였다. 국왕은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원활한 국가통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밀교승인 그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티베트의 초기 닝마파는 고려시대 성립된 총지종이나 신인종의 성립배경과 흡사한 점들이 많다. 2. 고려 밀종과 닝마파 고려시대의 총지종과 신인종은 티베트의 불교 종파중 하나인 닝마파의 성립배경과 외형적으로 유사한 점들이 많다. 닝마파는 초기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홍모파라고도 부르는데, 8세기후반 서북인도의 우디야나에서 활약하던 파드마삼바바가 전래한 밀교와 티베트의 토착신앙이 결합하여 성립된 종파이다. 훗날 이 파는 일반대중들의 민속신앙과 결탁한 주력파와 권력층의 지지를 받은 대구경파로 나뉘었다. 마치 우리 나라의 총지종이나 신인종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력파는 진언과 다라니를 중시한 총지종과 유사하며, 대구경파는 문두루비법으로 국난을 극복한 신인종과 닮은 점이 많다. 이와 같이 민중들과 국가가 처한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고려 초기의 밀교종파나 티베트의 닝마파는 국가권력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고, 국가 이익적 차원에서 폭 넓은 지지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티베트의 경우, 랑달마왕의 파벌 때에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민중들 속에서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그 맥이 계승되어 왔다. 그것은 이 파의 종교의식이 민간신앙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토속종교인 뵌교와도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건국당시 신인종의 개조로 받들어 진 명랑계통의 유파는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당시 광학과 대연이 그를 보필했던 사실로 보아 개국당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우리 나라에서 성립된 총지종이나 신인종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의 맥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성립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티베트의 닝마파에서 분파한 주력파나 대구경파도 티베트 독자의 종파로서 전개된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 나라와 티베트의 종파는 훗날 그 전개방식에서도 닮은 데가 많이 있다. 티베트의 경우는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술포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밀교경전들을 번역하고, 라트나링파에 의해서 10만고탄트라와 같은 주석서가 찬술되면서 교리가 확립되어 갔으며, 우파룽사가 건립된 뒤에 명실상부한 체계를 갖춘 종파로써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후 닝마파는 성문승으로부터 비밀승에 이르기까지 불교전반의 교리와 수행법을 인정하고, 그 중심이 되는 것으로 비밀승의 이론과 실천을 구경으로 삼았다. 여기서 이 파는 명실상부한 밀교종파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총지종과 신인종도 고려시대 수많은 도량을 개설할 때,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수법에 필요한 경전을 적시에 채용해서 활용하였다. 그것은 고려시대 개설된 도량들의 성격을 보면 주로 식재, 증익, 항복, 경애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들 4종수법에는 각각의 내용에 따른 경전과 의궤가 필요했다. 따라서 고려초의 밀교종파들도 한역된 다양한 종류의 밀교경전들과 신라시대이래 찬술된 여러 종류의 찬술집들을 활용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티베트의 닝마파의 성립배경과 고려밀종의 성립배경은 동일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