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6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4-09  | 수정 : 200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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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기의 신라밀교 구법연구활동 신라불교가 정착기에 접어들면서 내적으로는 경전의 연구가 진행되고, 외적으로는 구법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인도와 당나라로 구도의 길을 떠나는 유학승려들이 나타났으며, 일부에서는 일본에 불법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 때 원효, 의상, 경흥, 태현 등은 경전을 연구하여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고, 혜업, 현태, 구본, 현락, 혜륜 등은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또한 의상, 원측, 도증, 승장, 신방, 무상, 지장, 무루 등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불법을 연구하고 귀국하거나 그곳에 머물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무상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티베트불교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였고, 지붕, 지만, 지웅, 번상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일본에 불법을 전하였다.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밀교계에서도 국내외적으로 밀교의식의 봉행과 구법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구복적인 밀교의식이 봉행되었고, 한편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그런 의식과 관련된 경전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삼국이 통일된 8세기에 이르러서는 직접 법맥상승 밀교의 행법을 전수 받기 위해서 당나라에 유학하는 승려들도 나타났다. 당시 신라밀교의 흐름은 현세이익을 위한 의식의 봉행과 밀교경전에 대한 연구의 진행, 구법을 통한 행법의 전승이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밀본, 명랑, 혜통과 같이 약사구병법과 진호국가법, 항룡치병법을 주로 행하는 승려들이 있었고, 밀교승은 아니지만 원효, 경흥, 태현, 승장, 둔륜, 지인과 같이 구복적 밀교경전을 연구하고 저술을 남기는 승려들도 있었다. 그리고 현초, 불가사의, 의림, 혜초, 혜일, 오진, 명효와 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입당한 인도의 밀교승들로부터 상승밀교의 교리와 행법을 전수 받고, 그것을 번역·연구하는 승려들도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우리 나라 초기밀교의 형태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느 한가지 유형을 택하여 기준으로 삼을 경우, 다른 유형의 것들은 등한시 될 수 있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당시의 밀교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복경전의 연구 구복적 밀교경전은 행법의 법맥상승을 전제로 한 경전이 아니라 의식봉행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밀교경전을 말한다. 이들 경전에서 설하는 의식은 일반적인 불교의식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경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밀교의 행법이나 의식을 집행하던 승려들이 아니라 평범한 불교의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들의 주된 연구대상은 유희야경, 금강수관정경, 소실지경, 소바호동자경,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법맥상승 경전이 아니라 금광명경, 관정경, 약사경, 십이문다라니경, 십일면경과 같은 경전들이었다. 즉 당시 밀교승이 아닌 일반 승려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경전이 쉽게 연구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경전이 특별한 전법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연구할 수 있는 경전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라시대부터 우리 나라 밀교의 특색은 상승밀교의 행법보다는 국가수호나 질병퇴치를 위한 구복적 의식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 같다. 관정경을 통하여 외적을 퇴치하는 법을 연구하였고, 약사경을 통하여 질병의 퇴치법, 금광명경을 통하여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한 방법을 연구를 하였던 것이다. 실재로 이들 경전의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국왕과 백성들의 아주 소박한 염원을 성취시켜 주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 불교계의 사정은 불교의 교리연구와 더불어 백성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줄 수 있는 구복적 밀교경전의 연구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시대의 불교계 분위기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져서 불교의 다양한 도량가운데, 관정도량, 약사도량, 금광명경도량 등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인도에서 전승된 법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티베트나 일본에서와 같이 법맥상승의 중요성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밀교종파의 사자상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종파불교에서는 법맥을 상승하지 않은 법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거와 오늘의 현실이다. 상승의 법맥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전승밀교경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전승밀교경전은 수행을 통하여 궁극에 도달한다는 체계가 아니라 경전의 가르침대로 행법을 습득하기만 하면 곧 부처의 지위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다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은 곧 부처의 행인 것이다. 그래서 밀교경전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을 수행이 아닌 행법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행법밀교의 상승과 연구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진행되기 시작했고, 통일신라기에 다수의 구법유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상승경전의 연구 상승밀교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로부터 법맥을 가지고 전승되어 온 것을 말한다. 원효나 태현같은 승려가 상승밀교경전이 아닌 구복밀교경전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상승중시의 경전이 연구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상승밀교경전을 연구하려고 하였다면 구법유학과 전법상승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런 예는 일본의 진언종과 천태종의 관계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진언종의 공해는 구법유학을 통하여 교리와 행법을 동시에 상승받은 인물이고, 천태종의 최징은 구법유학은 했지만 행법을 전승받지 못했다. 최징은 훗날 그 행법을 전승받기 위해서 공해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인 현실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상승밀교의 전승과 전문밀교승에 의한 밀교경전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가사의는 상승밀교경전인 대일경의 공양차제법을 연구하여 비로자나공양차제법소를 저술했다. 이 차제법은 인도에서 다르마굽타로부터 선무외삼장에게 전승되었고, 다시 불가사의에게 전해진 인도의 정통법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아울러 그의 비로자나공양차제법소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밀교종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대일경의 가르침을 행법화시 켜 놓고, 행법의 과실을 제거하기 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진언종에서는 태장염송차제를 만들 때, 대일경의 제7권 공양차제법과 그 소의 내용을 전적으로 채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석마하연론은 오늘날까지 작자의 진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지만 신라의 월충에 의해서 저작되었다는 것이 정설화 되어 있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로써 일본 진언종의 종학 중에서 육대·사만·삼밀의 체계를 확립시켜 주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진언종에서는 그들 종파의 논서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나라의 학계에서는 석마하연론을 밀교의 논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석마하연론은 진언종에서 그들의 교학체계의 확립을 위해서 채용한 논서이지 밀교경전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튼 이것이 상승의 법맥을 가진 론이 아니라 할지라도 현재 밀교종단인 일본진언종의 종론으로 중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