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14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8-17  | 수정 : 200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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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도량과 증익도량 1. 경애와 증익도량의 성격 경애와 증익도량은 식재나 항복도량과는 달리 기도를 통하여 발생하는 위신력으로 상대방으로부터 항복 받거나 사악한 것들을 퇴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원을 통해서 경애심을 불러일으키고, 증익을 도모하는 형태의 수법을 근간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호마기도법의 기본 틀인 제존의 봉청, 찬탄, 서원, 봉송의 형식을 취하여 의식을 집행한다. 특히 이 도량에서는 온 우주에 편만해 있는 제존을 위무하여 의식단에 봉청하고, 그들의 공덕을 찬탄하며, 의식집행자 자신의 서원을 나타낸 다음, 제존이 편안하게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여기서 경애도량은 항복도량과는 반대로 만인들로부터 스스로 경애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도량이다. 따라서 이 도량은 수법자와 수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간에 신뢰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리고 증익도량은 소극적으로 일체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식재도량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따라서 이 도량에서는 경제활동의 번성이나 장수연명, 가계의 융성 등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재난을 모두 벗어난 다음에 행복이 있기 때문에 식재도량과 증익도량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외적으로 재난이 닥쳐오거나 그 징후가 있을 때, 식재나 항복도량을 개설하였고, 내적으로 상호 존경을 통하여 화합을 도모하거나 만사에 증익을 가져오려고 할 때 경애와 증익도량을 개설하였다. 2. 경애도량의 종류와 특징 고려시대 경애도량의 특징은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주로 왕의 생일을 맞이한 경축행사나 선대의 왕들을 추모하는 재를 통하여 백성들을 결집시키고 왕가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첫 번째로 기상영복도량은 국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왕에게 만복이 깃들도록 기원하기 위해서 개설된 도량이다. 이 도량은 경축행사의 성격을 띠면서 중앙의 정부는 물론 지방 각처의 행정구역에서도 동시에 집행되었다. 문종 때부터 그 형식이 정착되기 시작한 이래 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부처님 앞에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형식을 취하여 정기적으로 개설되었다. 개경의 외제석원에서는 왕족이 7일 동안 이 도량을 개설하였고, 동서양경과 4도호부, 8목의 각 사찰에서도 이 도량을 개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훗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축수도량이라는 명칭으로 계속 전승되었다. 두 번째로 기신도량은 원래 죽은 이의 기일을 맞이하여 재를 올리는 도량을 일컫는다. 특히 왕실에서 국왕이나 선왕후의 기일에 제사지내는 불교 의식도량을 가리키며, 휘신도량이라고도 한다. 이 도량은 성종 때부터 개설되었다. 즉 성종 때에는 당나라 태종을 모방하여 부군 대종과 모후 선의왕후의 기일을 맞이하여 각각 5일과 3일 동안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으며, 그 기간에는 한달 동안 도살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경애도량은 밀교경전에 입각한 것 이라기 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고려식 수법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3. 증익도량의 종류와 특징 고려의 증익도량은 수명의 연장, 왕권의 유지, 기우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첫 번째로 연명도량은 수명의 연장이 목적이면서도 식재와 증익을 동시에 도모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도량의 소의가 되는 금강식재수명다라니경법에는 식재연명법을 설하며, 금강수명다라니염송법에서는 제재연명법, 금강정유가호마의궤에서는 증익법과 연명법을 결합한 형태를 설하고 있다. 오늘날 전통사찰에서는 칠성각을 통하여 연명도량의 신앙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칠성신앙은 원래 중국의 도교적 신앙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수명연장의 신앙적 기능을 지닌 민속불교의 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정도량은 원래 밀교의 전법도량이지만 고려시대에는 국왕의 즉위식 때 개설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관정의식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법상종의 시조인 진표가 속리산에서 혼신의 힘으로 참회하던 영심과 융종 등에게 관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성격과는 달리 재난을 없애고, 국왕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기원법회형식의 도량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몽골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원종과 충선왕 때에는 왕의 즉위식에 밀교의 관정의식을 채용하여 거행하였으며, 강종과 충렬왕의 즉위식에도 이 도량이 개설되었다. 아마도 이 때 즉위식에서 개설된 관정도량은 티베트로부터 몽골을 거처서 고려에 전파된 전법관정의식의 전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고려왕조에서는 이와 같은 관정도량을 개설하여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세 번째로 기우도량은 가뭄이 심할 때 비가 내리도록 기원하는 도량으로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를 거처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하였다. 이와 같은 기우도량은 의식절차와 명칭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고, 금광명경도량, 소재도량, 신중도량 등의 의식절차에서 비오기를 기원하는 형식을 취하여 집행되었다. 기우도량, 운우경도량, 용왕도량 등이 여기에 속한다. 먼저 기우도량은 가뭄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열렸는데, 이 도량은 필요에 따라서 한 사찰에서만 집행하는 경우와 전국의 모든 사찰에 명하여 집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주관하는 기우도량보다는 마을 단위로 사찰에서 많이 행하여졌으며, 오늘날에도 사찰에서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서 기우도량을 개설하고 있다. 이때 의식의 집행은 괘불을 내걸고 야외에서 운우경을 외우면서 용왕권공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다음으로 운우경도량은 운우경을 소의로 하는 기우도량의 일종으로 고려시대에 자주 개설되었고, 용왕도량은 기우제의 형태로 개설되었는데, 용왕신앙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기우제는 신라의 진평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강종과 목종 때에 개설되었다. 이와 같은 용왕신앙은 제석천의 방계신중에 대한 신앙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도량은 보통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일이나 일주일 동안 진행되며, 일반적으로 사찰이나 왕궁에서 개설되지만 경우에 따라서 배의 위에서 집행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