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15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09-03  | 수정 : 200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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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만다라와 오불신앙 1. 고려의 만다라신앙 현재 우리 나라에는 밀교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서 만들어진 만다라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통일신라시대부터 밀교승들에 의해서 만다라가 그려지고, 수행의 법구로써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찰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만다라를 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행스럽게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보살상 복장유물 중에서 귀중한 만다라 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봉안된 보살상속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만다라에는 고려시대에 생존했던 시주자의 이름과 조성연대가 새겨져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것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이 만다라는 문자로 된 금강계만다라로 그 둘레에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를 비롯한 금강계 대일여래의 진언과 육자진언을 새겨 넣은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밀교에서 일반 불교신자가 만다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만다라를 불보살의 세계를 구현하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 불보살에 대한 공양을 통하여 공덕을 쌓으려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만다라를 조성하고, 그것을 봉안함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신앙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상은 밀교가 전파된 주변지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아마도 이것은 토착화된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금강계만다라가 오대산에 봉안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는 다섯 부처님이 머문다는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오불이 금강계만다라의 오불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오대산의 오불신앙은 신라시대이후 고려시대를 거처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 오불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 만다라가 봉안된 것은 당연한 이치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만다라는 밀교의 행법에 활용된 만다라가 아니라 1466년 봉안된 오대산 상원사 문수사리복장유물 중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원문에는 원나라 세조 29년(1292)이란 문구가 있어 이 만다라도가 조성된 후 174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고려시대의 도판을 재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만다라도를 어딘가에 새겨 넣었을 때, 그것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공덕이 지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오대산신앙과 더불어 오불의 세계를 구현한 금강계 만다라에 절대적인 위신력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 도판을 활용한 사람들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선대의 것을 계승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만다라의 외곽부분에 발원자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고려시대 이지와 이구라는 사람의 복을 빌기 위해서 특별히 조성한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고려시대에 쓰였던 것이 세조의 어의에 당시의 판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이씨 가계에서 대대로 보관되고 있었던 것이 재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고려 만다라의 특징 이 만다라의 조성을 발원한 사람은 아마도 금강계만다라 제존의 가피력을 통하여 조상의 명복을 빌고,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했던 것 같다. 그것은 문자로 된 만다라는 씨앗과 같은 의미를 지닌 종자의 문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씨족의 번성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본래 만다라의 조성이 가지는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 있으나 금강계만다라에 담겨 있는 제불보살의 지혜력을 세간적 공덕성취의 일환으로 전용하였다는 데에서 당시의 신앙적 특징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하여튼 이 만다라의 구성을 보면 매우 독특하다. 먼저 만다라의 중심에는 다섯 개의 종자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비로자나불과 사바라밀 보살을 나타내며, 그 상하좌우의 네 개 원 속에 있는 다섯 개씩의 종자자를 써넣어 사불과 십육대보살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네 개의 큰 글씨로 사섭보살을 나타내는 종자자를 써넣었다. 그 바깥쪽에는 팔엽연화를 그려서 부처님의 자비를 나타냈고, 그 사이에는 여덟 개의 문자로 팔공양보살을 나타내는 종자자가 쓰여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금강계 종자만다라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 부분만 보면 이 만다라의 용도를 파악하기 매우 힘들다. 그러나 이 종자만다라의 둘레에는 다른 두 개의 진언과 더불어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가 쓰여있다. 이 다라니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공양해서 얻을 수 있는 공덕에 뒤지지 않는 위신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후대에는 탑을 세운 뒤 거기에 보협인다라니를 조각해서 보협인탑이라 부를 정도였으며, 이 탑에 공양하는 것은 눈앞에 계신 불보살에게 봉사하는 것과 같은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원사 금강계 만다라의 본체 바깥부분에 씌어 있는 이 다라니도 이와 같은 의도로 수용되었으며, 거기에 육자진언과 금강계 대일여래 진언이 부가된 것은 오대산신앙과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오불신앙의 전개 우리 나라에서 오불진언이 활용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단서는 1346년에 조성된 연복사 동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진언은 본래 밀교의 수행의식에서 활용될 뿐, 공덕성취를 위한 독송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고려시대 범종을 조성할 때 이 진언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수행보다는 신앙적 측면에서 공덕성취를 위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종의 조성을 통해서 오불의 가피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 범종의 아랫부분에는 횡으로 오불진언이 티베트문자로 새겨져있는데 이들 진언 중에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밀교의 금강계차제에서 널리 활용되는 아축불의 진언 "옴 악쇼브야 훔 스바하 (옴 아축존이시여! 훔 스바하)", 보생불의 진언 "옴 라트나삼바바 트람 스바하 (옴 보생존이시여! 트람 스바하)" 아미타불의 진언 "옴 아미타바 흐리히 스바하 (옴 아미타존이시여! 흐리 스바하)"이다. 그리고 오불진언의 사이사이에는 불정존승다라니가 새겨져 있는데 이 다라니는 모든 업장을 소멸시키는 공덕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즉 이 다라니는 열 부분으로 나누어 존엄하신 부처님에 대한 귀의, 소리를 통한 법신의 표출, 지옥중생의 정화, 최상의 관정수여, 신비한 가피력의 표출, 수명의 연장, 선정과 지혜의 합일, 금강신의 성취, 깨달음의 성취, 열반경의 획득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이 범종에서는 오불진언과 불정존승다라니를 동시에 새겨 넣어 오불의 가피를 통한 불정존승의 공덕을 성취하려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