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통국사 창건설 ‘아름다운 가람’

편집부   
입력 : 2007-07-03  | 수정 : 2007-07-03
+ -

유석사의 비밀


소백산 도솔봉 남쪽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유석사(留石寺).

694(신라 효소왕 3)년 해동진언종(海東眞言宗)을 일으킨 혜통(惠通)국사가 창건한 사찰 유석사는 현재 조계종 제16교구본사 고운사의 말사로, 지천에 널려 있는 산야초와 들꽃처럼 소담스럽게 앉아있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 36-2번지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유석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러나 결코 단순한 여정이 아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 도솔봉 하나를 다 오르고 나서 다시 반대편 산아래로 남은 발걸음을 해야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유석사 가는 길은 바로 수행의 길이자, 고행의 행로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이 수행자와 불자는 물론 절을 찾아드는 모든 길손들에게 줄 수 있는 유석사만의 진정한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찻길이 나 있기는 하지만 큰 도로에서 이어지는 사과밭머리에 차를 세워두고 한발한발 발걸음을 떼어가며 등산을 하듯 걷는 편이 유석사를 찾아가는 제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유석사를 찾아가는 길 한 구비를 돌아 오르면 하늘은 그만큼 낮아져 천상이 가까워지고, 발 아래로 보이는 세상은 그만큼 더 멀어져 아득한 옛날 전설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또한 걸어서 유석사를 찾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색다른 멋이다. 큰길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접하게 되는 유석사 가는 길의 사과밭 역시 장관이다. 봄에 속살까지 비칠 듯이 피어난 하얀 사과꽃은 맑디맑은 청정계율의 표상이고, 가을에 발갛게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의 자태는 불보살의 세계를 표현한 장엄만다라에 다름아니다. 이 또한 유석사를 찾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풍요로움이다.

mg4929.jpg

당나라로 건너가 무외삼장으로부터 밀법을 배우고 665년 귀국한 신라의 고승 혜통국사가 소백산 자락 도솔봉 중턱에 창건했다는 것 외에도 유석사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의상대사가 이 절 대웅전 앞에 있던 느티나무 아래 반석에서 묵고 간 일이 있다고 해서 절을 짓고 유석사라 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희방사를 건립해 희사한 경주의 호장 유석이 두운조사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암자라는 설이다.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이 설은 혜통국사가 창건했다는 694년과는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내용은 643(신라 선덕여왕 12)년 두운조사가 태백산 심원암이란 암자에서 수도를 하다가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거처를 옮겨 초막을 짓고 생활할 때였다. 눈보라 치는 겨울 어느날 스님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산기(産氣)가 있는 호랑이였다. 스님은 이내 부엌에 검불을 깔아 새끼를 낳게 해 주었다. 그곳에서 새끼 두 마리를 낳은 후 산으로 되돌아 갔던 호랑이는 스님에게 은혜를 갚을 양으로 산돼지 한 마리를 물고 왔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그 후에도 호랑이는 초막 주변을 맴돌며 스님을 해바라기 했던 양 어느 날 다시 찾아와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의 한 처녀가 누워 있었다. 스님은 처녀를 곧 초막으로 옮겨 물을 끓여 먹이며 정신을 차리게 한 후 경주 호장 유석(兪碩)의 딸이라는 사연을 듣고 나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에 유 호장은 결혼식을 치른 날 저녁에 홀연히 사라진 딸을 며칠동안 찾다가 못찾아 결국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찰라에 스님이 딸을 데리고 나타나자 너무나 반가워서 보은(報恩)의 뜻으로 초막을 벗어날 절을 지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따라서 유 호장은 스님에게 3개월 동안만 경주에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고서 초막주변에 크고 아름다운 사찰공사를 벌였다. 이 절이 희방사(喜方寺)다. 온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희방사를 완공한 뒤 유 호장은 또 스님과의 인연을 오래도록 갖기 위해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유석사(兪碩寺)라고 이름하고, 토지 1백여 두락(斗落)을 사서 공양미를 올리게 했다는 설이다. 이 절이 오늘날의 유석사(留石寺)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느 이야기가 맞건, 틀리건 혜통국사 창건설이 대부분 자료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갖 풍화와 재난으로 훼손과 중창을 거듭해온 긴긴 세월 동안 선인들의 숨결과 자취는 실체없이 바람결에만 흩날릴 뿐이니 뒷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해동밀법의 전법륜을 굴려온 혜통국사의 그 높은 위덕(威德)이 이곳에서도 사자후가 되어 큰 울림으로 진동했다는 정황을 작은 돌멩이 한 조각 정도라도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발아래로 보이는 세상과의 아득한 거리만큼이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