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서 배우고 깨닫는다 1

편집부   
입력 : 2013-08-19  | 수정 : 201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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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즉다(一卽多·어울려 살아감)

여기저기에 해바라기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밝고 노란 색깔이 더욱 선명하다. 비록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해바라기의 개화는 머지않아 가을이 온다는 징조로 보면 된다. 해바라기라는 이름은 해를 따라 도는 식물이라고 하여 중국 사람들이 붙인 '향일규'(向日葵)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름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따르면 헬리오스(태양 신)를 짝사랑하던 한 요정이 상사병으로 죽은 후 해바라기로 환생하여 언제까지나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꽃말도 '숭배'와 '기다림'이다. 영어 이름 sunflower는 그리스어 'helios'(태양)와 'anthos'(꽃)의 합성어인 헬리안투스(Helianthus)를 번역한 말이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다음 유럽에 알려진 식물로 '태양의 꽃' 또는 '황금꽃'이라고도 불린다. 전 세계인들이 해바라기를 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해바라기 정치인'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자에 빌붙어 아부하는 정치인을 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도는 습성이 있다는 말은 오해이다. 태양을 향하는 것은 꽃이 피기 전의 일이며, 꽃을 피운 다음에는 태양을 향하는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지상의 모든 식물들 습성이다. 대부분의 식물은 태양 빛을 향해 뻗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식물이 생장하는데 꼭 필요한 광합성작용을 위해서이다.
일본에서는 원전사고 후 방사능 오염의 정화를 위해 일부 지역에 해바라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구 소련 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해바라기의 방사능 오염지역 정화효능이 밝혀졌다. 해바라기는 꽃으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씨앗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만들어내어 스스로를 죽이는 방사능을 대량으로 제 몸에 담아 피폭지역을 정화하는 일까지 해내고 있는 것이다. 해로운 방사능을 흡수한 해바라기가 온전할 리는 없다. 유전자가 변형되어 마침내 제 모습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는 본능적으로 오롯이 그 일을 묵묵히 해냄으로써 뭇 생명을 살린다. 방사능을 퍼트린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해바라기의 불성이고 '일즉다'(一卽多)의 정신이다. 선행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해바라기 보살의 참모습이다. 

흔히들 부처님이라 하면 2557년 전에 열반하신 석가모니불만 떠올리지만, 진정한 부처님은 온 법계(우주)에 충만한 진여불성이다. 모든 사람들과 동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 모두 불성을 갖춘 부처라는 말이다. 즉 법신이란 일체의 법을 이루는 본각진성으로 일체 만유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가 아니며, 만유는 바로 법신을 바탕으로 생겨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수천 겁을 거치면서 마음이 오염되어 무명한 중생들은 너와 내가 다르고 중생과 부처가 다르다고 여길 뿐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법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무명에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다. 무명을 벗어나 보살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불성이 드러난 정도는 각기 다르다. 정도의 차이일 뿐 불성을 갖추지 않는 중생은 없다.

불자들이 찾는 여러 부처님들과 보살들 또한 따로 존재하는 분들이 아니다. 법신 부처님의 공덕이 워낙 지대하여 중생들의 원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처님의 공덕을 나누어 나투신 분들이다. 자비의 공덕을 나누시는 관세음보살, 지혜의 삶을 나누시는 문수보살 등…. 그러나 부처님의 공덕은 이분들에게만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시야를 넓히고, 조금만 더 깊게 사고하면 보이지 않던 불성이 삼라만상 모든 것에 존재하며 이들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수많은 행성 중 하나인, 우리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지구. 이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화수목금토라는 무정물과 사람, 동식물 등 유정물들 중 불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삼라만상 중에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기르고 가꾸지 않은 식물을 잡초라고 하여 하찮게 여긴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각종 산약초들,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산삼도 알고 보면 잡초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삼은 허약해진 인간의 기력을 돋우고 병을 치료하는 불성을 갖추고 있다.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 같은 들풀 또한 소나 말 같은 짐승들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불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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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보장 각자 / 보정심인당 신교도



'화엄경'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일다상즉(一多相卽) 주반구족(主伴具足)'이라 설하고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요, 여럿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와 여럿은 서로 상응하여 주된 것[주]과 함께 하는 것[반]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라고 풀이된다. 첨단물리학에서 세상은 모두 닮은꼴로 만들어졌다는 프랙탈(fractal)이론과도 통하는 말이다. 겉으로는 불규칙해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떤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카오스(chaos)이론이라면 그 혼돈된 상태의 공간적 구조로,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으로 표현한 것이 프랙탈이론이다. 하나의 형상 속에는 다른 여러 형상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복잡한 형상일지라도 하나의 형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삼라만상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융합하여 무한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일즉다'란 하나 안에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고, 많은 것 속에는 하나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눈에는 삼라만상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우주본체는 평등한 진여(眞如)를 지니고 있기에 개별적인 모습은 결국 우주본체의 진여를 담게 된다는 말이다. 산을 예로 들어보자. 산은 바위와 흙, 나무와 풀 등의 여러 성품으로 형성된 복합체이다. 바꾸어 말하면 산이란 여러 성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개별의 형상은 아니다. 하나[一]가 모여 많은 것[多]을 이루고 많은 것은 각각이 모여 성립한다.

'일즉다'는 곧 어울려 살아감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성인의 말씀으로나 겨우 불성을 내보일 수 있지만, 다른 유정물들은 본능적으로 불성을 드러낸다. 식물은 스스로 생산한 것들을 제가 다 차지하지 않는다. 잎과 뿌리와 줄기로 자신이 힘들여 생산한 것들을 기꺼이 나눈다. 또 대기와 땅속에서 살아가는 미생물들은 식물이 내놓은 것들을 섭취하기 위해 모여들어 막을 형성함으로써 식물에게 해로운 것들의 침투를 막는다. 뿌리에 모여든 미생물들은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를 생성하여 식물의 뿌리가 땅속으로 쉽게 자리를 잡도록 암석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즉다' '다즉일'의 실천이며 그 자체로 법신 부처님들이다.
나아가 회당 대종사님께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고 하셨다. 이 말씀 중 '하나'는 곧 '일'(一)을 이르심이며, '온 우주에 충만'은 '다'(多)를 나타내심이다. 이는 곧 우리들 앞에 직면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을 포용하고,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말씀의 행간에서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부처님으로부터 상생의 진리를 터득하여 서로 배척하지 않고 어울려 살아가라는 대종사님의 숨어 있는 가르침까지 파악해야 한다.     

dukil.jpg  덕일 정사 / 보원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