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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병아리

밀교신문   
입력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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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쯤 내려왔을까. 휴대폰도 잠을 자는 오지에 웬 병아리 소린가. 귀를 의심하며 지나치는데 더 크게 들린다. 성큼성큼 풀 속을 헤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럴 수가! 노란 바탕에 갈색 줄무늬 옷을 입고 조막만 한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꿩병아리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안심하고 새끼를 깐 것이다.
 
어린 시절 본 이후로는 처음이다. 대여섯 마리나 된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내 마음과는 달리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난 무단 침입자에 놀라 종종걸음 친다. 평화롭던 분위기가 험해졌다  
 
짧은 다리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죽으라고 달린다. 어미는 행여 새끼가 다칠세라 어쩔 줄 모르고 새끼는 혹여 잡힐세라 삐악삐악 목청껏 소리 지른다. 저들은 목숨 걸고 달아나는데 나는 너무 귀여워 따라가며 지켜본다.
 
한 마리가 무리에서 멀어졌다. 자세히 보니 다른 녀석보다 조금 작아 보인다. 작은 바위 끝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어미를 애타게 부른다. 어린 것한테는 천 길 낭떠러지리라. 굴러 떨어질까 걱정되어 땅바닥에 내려줄 요량으로 가까이 갔더니 어미가 푸덕거리며 난리도 아니다. 새끼를 잡아가려는 줄 아는 모양이다. 통할 리가 없건만 그런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다가가다가 멈추어 섰다. 이러다 어미도 다치겠다 싶어 살며시 물러나 나무 뒤에 몸을 숨긴다.
 
침입자가 없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드는지 어미는 낮은 가지에 앉아 날갯짓으로 새끼를 안심시킨다. 다른 새끼들은 어미가 있는 곳까지 와서야 따라오지 못한 녀석을 돌아본다. 염려스럽기만 할 뿐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은가. 어미와 뒤처진 녀석을 번갈아 보며 부산하게 제자리를 맴돈다.
 
외톨이가 된 녀석은 울기를 멈추고 살길을 찾는다. 자신을 구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어디로 내려가는 게 안전할까?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성냥개비보다 더 짧고 가는 다리를 이리저리 내밀어 본다. 드디어 한 곳이 맘에 들었나 보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한쪽 다리를 내밀어 미끄러져 내리는가 싶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쩌나, 금방 달려가 일으켜주고 싶지만 꾹 참는다. 다행히 낙엽이 쌓인 곳이다. 몸을 몇 번 뒤척이더니 일어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간다. 하마터면 만나지 못할 뻔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서로 위로해 주는지 털을 쪼며 야단이다.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그래 내가 너희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섣불리 나섰다가 큰일 날 뻔 했구나.’
 
아마도 오늘 밤엔 산속에서 만난 꿩병아리들이 꿈에 나타날 것 같다. 어미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를 하겠지. 어미는 위기를 지혜롭게 모면한 어린 것들을 칭찬하며 감싸주리라. 놀라고 무서웠겠지만 이런 일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다독여 주겠지.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애를 태운 녀석은 이야기에 끼지도 못하고 벌써 꿈나라로 가고 없는데 말이다. 혹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녀석들이 다칠까봐 마음을 어찌나 졸였던지 피곤이 몰려온다.
 
어릴 적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아버지를 따라 들에 나갔다가 보리밭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는 꿩병아리를 발견했다. 콧등에 땀을 흘리며 쫓아 다녔지만 번번이 허탕 쳐서 아버지께 잡아 달라고 졸랐다.
 
“자그마하다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아부지 걸음으로는 어림도 없어. 저놈들이 쉽게 잡힐 것 같으냐? 사람들이 늘 댕기는 이런 보리밭 사이에다 새끼를 깐 걸 보면 사람들 걸음쯤이야 거뜬히 따돌릴 수 있다는 말이지.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단다. 아직 어미 품이 그리운 새끼 잡아다 놓으면 지레 죽는다. 고 이뿐 놈들 구경했으면 됐다. 자꾸 따라다니지 마라. 너도 기운 빠지고 어린것들도 놀란다. 잘 달아나는 사람들을 보면 오죽하면 꿩병아리처럼 내빼는 놈이라고 하겠냐.”
 
아버지는 미물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