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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소리를 듣는다

밀교신문   
입력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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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마지막 한 방울 물기마저 다 짜낸 채 바스락거리며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인과의 법과 더불어 윤회의 법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열매를 맺은 다음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 그자체로 하나의 윤회인 것입니다. 몇 억 겁 년에 걸쳐 나고 죽는 것이 윤회라면, 극락과 지옥이 현생에 있듯이 윤회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라는 질병도 인과의 법과 윤회의 법에 따라 일어난 것이니 언젠가는 소멸할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전염병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경제적 폐해도 심하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의 여파로 집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가족 간의 갈등도 점점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청소년 자녀를 두고 있는 한 보살님이 이런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험한 말이 나오고, 아이들은 반항심만 생겨 서로 갈등만 깊어진다고 하시면서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아이들만 보면 울화통이 터져서 험한 말부터 나와요. 내가 아이들한테 말로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험한 말을 하면 반발부터 생기게 되는데, 험한 말도 문제이지만 서로의 말과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부처님의 오른쪽 눈빛에서 태어나자마자 옴마니반메훔을 외쳤다고 합니다. 이 진언을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本心微妙六字大明王眞言)’이라 하는데 보통 줄여서 육자진언이라고 합니다.

 

<대승장엄보왕경>에 의하면 비로자나부처님의 비밀한 경지를 인간세계에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모든 불보살의 대표로 내세워 옴마니반메훔의 육자진언을 설하게 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위신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옴마니반메훔만 외어도 듣고 달려와서 구해준다고 했으며 <관세음육자대명왕신주경>에서는 육자진언 염송하면 천겁에도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육자진언 염송하면 생로병사 받지 않고 천재만액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관세음이 과연 무슨 뜻인가? 관세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말과 소리[]를 관()한다는 뜻으로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이 하는 마음의 말을 듣는 분이기에 관음보살은 듣기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살은 어찌하여 듣기의 대가가 되었을까? <능엄경>에 의하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 문수보살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각각 어떤 방편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발표하는 기회를 줍니다. 그 결과 스물다섯 가지의 방편이 제시되는데, 관세음보살은 듣기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득한 옛날을 기억하자면 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투셨으니 그 이름을 관세음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보리심을 내자 그 부처님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삼매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듣는 가운데에서 깊이 관조하며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자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두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이 정진하는 과정에서 듣는 주체와 들을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들음이 다하였지만 다시 듣는 데에 머물지 않고 계속 정진하자 깨달음과 깨달음의 대상이 사라지고, 생멸에 대한 인식마저 사라지니,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은 듣기를 통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신묘한 힘을 얻고, 아래로는 육도중생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슬프거나 갈구하는 마음을 바로 느끼고 그들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서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문수보살이 듣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듣기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열반의 문에 도달한 길이다. 과거의 모든 여래들이 이 문으로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들도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미래에 수행할 이들도 응당 이로써 깨달을 것이며, 나 또한 그 가운데에서 깨달았느니라. 사람들이 듣는 자신의 일체의 마음을 듣는다면[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최상의 도를 이룰 것이다.”
  

여기에서 일체의 마음을 듣는다 함은 소리자체가 아니라 소리 너머에 있는 마음을 알아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가진 육근 가운데 왜 하필 듣기일까? 육근 가운데 듣기가 집착으로부터 가장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귀는 늘 열려 있어서 늘 상대방의 말을 듣고 소통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마저 귀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나쁜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말부터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서로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하더라도 나무라기 전에 충분히 아이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지만, 나무라기부터 하면 아이는 귀를 닫게 됩니다. 귀를 닫으면 마음이 닫히고 마음이 닫히면 소통이 불가능해지며 소통이 불가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은 왜 오셨을까? 그렇습니다. 마음을 열고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적어도 시시처처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는 우리 진언행자는 말하기에 앞서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언의 소리로 중생들의 아픔의 소리를 들읍시다.

 

이행정 전수/무애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