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바뀌는 시기일수록 마음은 더 분주해지고, 그만큼 감정의 얼굴도 자주 바뀐다.
신년호에 어울리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주제로 잡았다. 하지만 문장을 덧붙일수록 행복은 너무 크고 둥글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대신 작지만, 날카로운 불안이 손에 쥐어졌다. 행복을 굴릴수록 불안은 그 윤곽을 더 드러냈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바랄수록 불안은 더 선명해진다. 새해를 맞아 마음을 다잡고 잘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설수록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래서 1월의 불안은 근심이 아니라 성찰에 가깝다. 불안은 잘못 살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서른의 불안은 ‘선택’에서 온다. 십 대에는 대학 입학이라는 시험이 있었고, 이십 대에는 취업이라는 결과가 있었다.
노력의 방향은 분명했고, 성취는 점수나 합격 여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른의 선택지는 다르다. 더 이상 시험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결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 선택들은 노력의 총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가치관과 성장의 궤적을 근거로 삼는다.
그렇다 보니 선택에 확신이 없을수록 나를 지탱해 온 뿌리까지 함께 흔들린다.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의심은 곧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번져 간다.
아직 어떤 선택의 인과를 분명히 꿰뚫어 볼 만큼의 혜안도,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담담히 감당할 만큼의 경험치도 충분하지 않은 시기다.
이십 대처럼 청춘을 담보로 도전하기에도, 마흔처럼 선택의 무게를 다룰 노련함을 갖추기에도 이른, 미성숙과 성숙이 맞물린 단계에 놓인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가르는 선택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이 시기의 불안은 현실 회피가 아니라, 선택의 무게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내 마음에 불청객처럼 찾아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늘 같은 말을 한다. 잘 살고 싶다고.
그래서 나는 불안을 밀어내는 대신 잠시 앉힌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차 한 잔 정도는 내어준다.
불안이 경고라면, 그것은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라 속도를 줄이라는 신호에 가깝다. 그림만 그려진 방지턱처럼. 실제로 턱은 없지만 주의는 필요하다.
그것을 실재로 착각해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오히려 사고가 난다. 그저 속도를 조절하며 방향을 확인하면 된다.
인생은 직진만 놓인 길이 아니기에 가능성마저 사라진 나이는 아니다.
불교에서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하여,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가르친다. 대신 밝혀 주는 길은 없고, 대신 선택해 줄 사람도 없다.
서른에 이르러 느끼는 불안은 부모의 보호나 사회의 기준이 아닌, 전적으로 자기 손으로 삶의 방향을 들어올려야 하는 시점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길을 잃었다는 신호가 아니라, 내가 곧 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증거다.
양유진/글로벌 서비스 담당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