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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지금 그대로 내 앞에 있는 사람

밀교신문   
입력 : 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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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악사에게 전해져 오는 전설을 그린 영화 <현 위의 인생>을 병오년 새해 아침에 생각한다. 1992년에 개봉한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로 중국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영화 속 주인공인 노인은 눈먼 악사이다. 그는 거문고 줄을 천 개 끊을 정도로 평생을 다해 연주하다 보면 눈을 뜰 수 있을 거라는 스승의 말을 믿고 수행하듯 살아간다. 우리도 노인처럼성공하면’, ‘돈을 벌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행복해질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미래의 성공이란 늘 불투명 속에서 불확실하게 존재하고, 부단한 노력과 정진의 과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세상에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란 우리의 상상 너머에 있고, 수많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탄생한다. 마침내 천 번째 현이 끊어지고 손에 든 처방전을 열었을 때, 그것은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백지 처방전이었다. 눈을 뜰 수 있다는 희망이 가짜였음을 깨닫는 순간, 노인이 눈을 뜨기 위해 앞만 보고 연주하는 동안, 정작 그의 곁에는 늘 제자 시두와 그를 사랑했던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처방전이 백지였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초에 목적지(미래)에 도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리라. 참된 인생이란 목적지에 도달해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천 개의 현을 끊어가는 그 지난한 과정과 기다림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인생에서 구원이란 살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진실하고 절실한가를 되묻는 일이며, 결과 그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노인이 연주할 때 그의 음악에 눈물 흘리고 위로받았던 사람들, 즉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한 해는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아픈 소식이 섬까지 밀려와 마음을 졸이며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다시 건강도 체크하고 양가 부모님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육지서 살 때는 사람 그리운 줄 미처 몰랐다. 고마운 분들을 밤마다 하나, 둘 호명해 가슴에 새겼다. 요즘 들어 건강하란 인사가 절반이 넘는다. 언제 그런 나이가 되었는지.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 했던가. 그러나 아직 중생인지라 죽음은 두렵고 안타까움에 더 가까이 있다. 부디 새해에는 우리도 저마다 차곡차곡 천 일의 참회를 준비하자. 하지만 그 참회의 목적이 먼 미래의 허상에만 있다면, 우리는 또다시 눈앞의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영화 속 노인은 결국 다시 악기를 켠다. 이제는 눈을 뜨기 위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기 위해서이다. 2026년 병오년의 키워드가 변화, 전환, 성장, 도전, 진취성, 자율성이라면 당신의 참회는 누구를 향한 간절한 사무침인가? 항상 명심하라. 잊어도 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내 앞에 온 사람은 그만한 까닭이 있고 그래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평생을 바쳐 천 개의 줄을 끊어낸 백발의 노 악사가 마주한 것은 찬란한 시력이 아니라, 한 장의 빈 종이였다. 인생이라는 처방전은 원래 비어 있는 것이고, 그 빈칸을 채우는 것은 미래의 성취가 아니라, 지금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바로 내 앞에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새해에는 육안(肉眼)이 아닌 오롯이 감사와 지혜의 불심인(佛心印)인 마음의 눈을 뜨자.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이문재 시인의 시 지상의 아픈 마음들 다 받아내는/저 달은 그래서 둥글어지는 것인가/그래서 저토록 둥글고 밝은 것인가 <달의 백서1>/내가 새로워져서 지금 여기가 길고 넓고 깊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침묵에서 가장 먼 곳까지>”을 새해 아침에 떠올린다.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수진주 전수/식재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