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 “올해는 잘 살아야지”,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은 결과가 좋은 한 해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바로 그 태도가 한 해의 결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업을 짓고 살아갑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마음속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각 하나까지도 모두 업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이 업은 우리가 계산하듯 정확하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씨앗 하나를 심었는데 어떤 해에는 열매 하나로 맺히고, 어떤 해에는 가지마다 수십, 수백 개의 열매로 이어지듯이, 업의 과보 또한 그때그때의 인연과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법구경의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요,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청정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이 말씀은 업의 시작이 바깥의 상황이나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마음에 있음을 분명히 일러줍니다.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업을 동숙이라 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업을 이숙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형태가 어떠하든 한 가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좋게 지은 것은 좋게, 나쁘게 지은 것은 나쁘게 돌아온다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다만 그 돌아옴이 우리가 기대한 방식이 아닐 뿐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종종 경험하는 것은, 계산하며 지은 선업보다 무심하게 흘러간 선행이 더 깊고 오래 남는 인연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각자님께서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 대회에서 상으로 받은 노트 몇 권을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연히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때 네가 준 그 노트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라고 말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기분이 좋아서 한 일이었고, 그 일을 잊고 지냈는데 기억을 하고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회사에서 권장하는 대학원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그 대학에 교수로 있던 친구는 더 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무심한 한 번의 베풂이 인연이 되어 시간을 건너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이것은 욕심에서 나온 소원이 아니라, 계산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단단해진 서원의 힘입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불공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서원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 이익을 먼저 세운 바람인가, 함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인가.
“불공도 하고,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왜 삶은 오히려 더 힘들어질까요?”
까만 도화지에 찍힌 검은 점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점은 금세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밝아질수록, 그동안 보이지 않던 업과 습관이 드러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불공을 하면 법문이 찾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햇볕이 들면 보이듯이, 불공을 통해 마음이 밝아질수록 닦아야 할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 지금 내 마음이 밝아지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의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병오년은 불의 기운을 품은 해입니다. 불은 태우기도 하지만, 어둠을 밝히고 길을 비추는 힘이기도 합니다. 이 새해에 우리가 밝혀야 할 불은 밖을 향한 욕망의 불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치는 지혜의 불입니다.
그 씨앗이 당장 열매를 맺지 않더라도, 이생에 다 닦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욕심이 아닌 서원으로 마음을 쓰고, 계산이 아닌 무심한 공덕으로 한 발을 내딛는 일입니다. 그렇게 쌓인 하루가 모여, 결국 한 해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도화지는 반드시 맑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맑아진 마음이야말로 병오년 새해,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복 아닐까요?
선법지 전수/유가심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