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나의 신행 이야기

“저에게 불공은 자연스러운 일과였습니다”
저의 모친은 포항 위덕심인당과 증일심인당에서 교화하신 입법정 전수님입니다.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심인당에 가야 했고, 매일 같이 정송도 해야만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과였지요. 전수님께서 포항 증일심인당에 계실 때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심인당에는 20가구가 넘는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쟁 후에 사회적으로 가난과 병고 해탈이 꼭 필요했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너나없이 믿음이 필요했던 때였습니다.저의 모친께서도 전쟁 후에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용맹정진하셨고, 그때 저희 모친을 오래 지켜봐 주셨던 스승님이 교화의 길로 인도해주신 걸로 압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늘 수행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심인당의 스승님들이 선각자의 역할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병원과 연결해 주시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시기도 하셨죠. 저도 10살 때쯤인가 눈병이 나서 고생했는데, 그 때 스승님께서 병원을 알아...
2026-03-26
“어머님의 신심은 제 삶의 뿌리”
어린 시절의 저는, 제가 선택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심인당을 드나들었습니다.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부터 심인당 마룻바닥에 앉아 염송하던 그 시간들은, ‘신심’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자성일 아침마다 꼭 보고 싶던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단호하셨습니다. “먼저 불공이다.”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심인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때로는 무거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제 인생 신행의 씨앗이었습니다. 어머님의 엄한 사랑과 간절한 서원이 저도 모르게 제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입니다.제가 스스로 신행에 마음을 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골에서 대구로 전학을 온 뒤 보원심인당에 다니면서 였습니다. 그때부터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제 마음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새해대서원불공 때는 세 시간 정진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성학교에서부터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습...
2026-03-05
“‘옴마니반메훔’ 염송으로 매일매일 참회하는 삶 살아가”
저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조계종 신도였다가, 종조님을 뵙고 심인당을 다니게 되셨습니다. 자연스레 어머니께서도 심인당에 다니셨고 신심이 두터우셨습니다. 그 당시 제가 어린 시절 새벽 5시면 정송을 시작하시며 저를 깨우셨고 저는 잠을 못 이겨 눈을 비비고 앉아 염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대구 희락심인당에 다녔고,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취업했다가 다시 귀경하기까지, 희락심인당은 유년기와 청년기의 요람이었습니다. 5살쯤인가? 심인당 불사 시간에 염송하시는 할머니 앞에서 방석에 누웠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불사가 끝나 텅 빈 법당에 무릎 덮개를 덮고 있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마당으로 내려가니 보살님들이 두런두런 법담을 나누시다가 웃으시며 맞아주시던 기억이 제게는 힘들 때마다 떠오르는 따뜻한 장면입니다.전 국민이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라 밥 지을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갈씩 절량미를 모았고 희사고에는 지폐보다는 동전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2026-03-05